일러스트=챗GPT 달리

지난해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을 뒤흔든 뉴스를 하나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을 고를 것이다. 그동안 국내 기업이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자산이 13조원에 달하는 대기업이 국내 사모펀드로부터 공격을 받은 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시장에서는 고려아연을 계기로 올해 적대적 M&A에 노출되는 기업이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경영권 분쟁의 당사자인 MBK파트너스는 “기존 최대주주인 영풍과 손을 잡은 것이기에 적대적 M&A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으며 실제로도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그동안 상대편인 최윤범 회장 측이 이사회를 장악하고 경영을 도맡아 왔다는 점에서 적대적 M&A로 정의할 수 있다는 시각이 많다.

오는 23일 고려아연 임시 주주총회에서 어느 쪽이 승기를 잡을지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한다. 그럼에도 고려아연 사건은 적대적 M&A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을 180도 바꿔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행동주의 펀드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적대적 M&A를 더 ‘큰물’로 끌고 나왔기 때문이다. 막대한 자본을 가진 거대 사모펀드와 전통적 의미의 재벌이 정면으로 맞붙은 사건이다.

재벌 기업들이 고려아연 사례를 보며 우려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경영권이 창업주 1~2세대에서 3~4세로 승계되는 과정에서 대주주 중심의 지배구조가 취약해진 회사가 많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온 영미권 기업들은 창업주 가문의 지분율이 얼마나 되는지가 중요하지 않지만, 한국 기업들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10~20%대에 불과한 낮은 지분율로 기업을 경영해 온 재벌들은 사모펀드 같은 외부 세력의 ‘도전’을 걱정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실제로 범 삼성가(家) 기업인 한솔케미칼은 몇 년 전부터 지배구조의 취약성을 해결할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해 왔다. 2세 조동혁 회장과 3세 조연주 부회장 등 대주주 지분율이 1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솔케미칼은 2015년에는 최대주주 지위를 KB자산운용에 빼앗긴 적도 있다. 결국 작년 초 조 부회장의 지분을 DI동일 자사주와 맞교환하는 방안까지 추진했으나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솔케미칼과 지분 맞교환을 논의했던 DI동일 역시 대주주 지분율이 20%에도 못 미친다. 이 회사는 실제로 최근 경영권 분쟁 위기를 넘긴 바 있다. 소수주주가 감사위원 교체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 의안은 주주총회 특별결의 요건(67% 동의)에 못 미치는 60%의 찬성률을 기록하며 부결됐지만, 국민연금과 외국인 주주들까지 소수주주의 손을 들어줬던 것으로 나타나며 화제가 됐다. 결국 회사 측은 부랴부랴 주주환원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업계에서는 최대주주 지분율이 낮아 2대주주와의 격차가 작은 기업들에서 경영권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나정환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례로 엔씨소프트를 언급했는데, 이 회사는 최대주주인 김택진 대표가 지분 11.9%를,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 PIF가 9.3%를, 넷마블이 8.9%를 보유 중이다. PIF와 넷마블은 전략적 지분 투자를 했을 뿐이라며 선을 긋고 있으나 대주주 지분율이 현저히 낮은 현 상황에선 언제든 적대적 M&A에 노출될 위험이 잔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 연구원은 그 외에도 현대엘리베이터·녹십자홀딩스·금호석유화학·한국카본·아세아·아난티 등을 주목했다.

적대적 M&A 등 경영권 분쟁은 전세계적으로도 증가하는 추세다. 미국의 기업 거버넌스 분석 업체 딜리전트마켓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지난 2023년 전세계 982개 기업이 주주행동주의 캠페인의 대상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주주행동주의가 반드시 적대적 M&A로 직결되는 건 아니지만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딜리전트마켓인텔리전스는 특히 북미 시장에서 550개 기업이 주주행동주의의 타깃이 됐다고 분석했다. 이는 전년 대비 20.8% 증가한 규모다. 아시아도 경영권 분쟁이 뚜렷한 증가세를 나타내는 지역이다. 한국에서는 주주행동주의 캠페인이 전년 대비 57% 늘어난 77건으로 집계됐고, 일본에서는 총 103개사가 행동주의 캠페인의 타깃이 됐는데 이는 아시아 전체의 47%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