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성규

기업 가치를 올리겠다는 밸류업(가치 제고) 정책을 편 지 1년이 됐지만, 오히려 국내 주식시장에서 작년 한 해 기업 가치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1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작년 코스피(유가증권시장)의 PBR(주가순자산비율)은 0.84로 집계됐다. PBR은 주가를 장부 가치로 나눈 것으로, 숫자가 작을수록 저평가됐다는 뜻이다. 작년 PBR은 2002년 관련 자료를 집계한 이후 코로나 사태 여파가 있었던 2022년과 같은 역대 최저치다. 글로벌 금융 위기 때인 2008년도 0.94였다.

지난 1년간 정부가 밸류업 정책을 편다고 떠드는 동안 국내 증시는 전진한 게 아니라 거꾸로 간 것이다.

그래픽=김성규

◇밸류업 1년, 곁가지 정책만

지난해 1월 17일 정부가 민생 토론회에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도입해 상장사의 기업 가치 제고를 유도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후 외국인 투자자들의 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국인 순매수액은 1월 3조4830억원에서 2월 7조8580억원으로,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당시 우리보다 앞서 밸류업 정책을 시행한 일본 증시가 34년 만에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것도 영향을 줬다. 골드만삭스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추가 상승을 이끌 중요한 촉매제”라며 “코스피 지수가 1년 안에 2850까지 갈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외국인 투자자들의 기대감은 곧 실망감으로 변했다.

정부에서 추진하던 주요 정책들은 야당과 대기업 반발 등 각종 이해관계에 부딪혀 진행되지 못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며 밸류업 기업에 대한 법인세 감면 등은 물 건너갔다. 소액주주 권익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은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이에 외국인 순매수는 7월까지는 어느 정도 유입됐으나, 8월 이후에는 23조원 가까운 돈이 빠져나갔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일본은 증시 밸류업을 위해 2014년 기업 지배 구조를 바꾸는 정책부터 시행했다”며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핵심적인 문제는 개선하지 못한 채 기업 공시나 밸류업 펀드 조성, 배당소득 분리과세 같은 곁가지들만 진행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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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 개미는 미국으로 탈출

외국인 매수세가 주춤하자 개인 투자자(개미)들도 밸류업을 믿지 못하고 대거 한국 증시를 떠났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거래 대금은 5100억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2732억달러) 87% 증가했다. 10년 전인 2014년(52억달러)과 비교하면 9708% 증가했다.

지난해 코스피가 9.6% 하락할 때, 미국 나스닥은 약 30%의 상승률을 내는 등 미국 등 해외 주식시장은 활황세였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 증시만 부진해 “국장(국내 증시)을 떠나는 것은 지능순” “돈을 버는 제1원칙은 국장을 하지 않는 것” 등의 유행어도 등장했다.

김재은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은 신NISA 세제 혜택으로 주식시장에 유입된 개인들이 주식시장 상승세를 뒷받침하는 수급 요인이 된 반면, 한국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혜택 확대 정책 부진에 한국 증시 침체까지 겹치며 개인 투자자들이 대거 떠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세제 혜택 등 정책 지원 있어야”

개별 종목으로 봐도 기업 가치가 청산 가치에 못 미치는 기준인 PBR 1 미만인 기업이 전년보다 늘었다. 일본도 PBR을 1배 이상으로 높이는 것을 밸류업 정책 목표로 삼고 있다.

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에서 PBR 1 미만인 기업은 작년 573사로, 전년(520사)보다 오히려 늘어났다. 코스닥도 PBR 1 미만인 기업이 776사로, 전년(540사) 대비 늘어났다.

한국 증시를 이끌어야 할 대장주들의 실적도 부진했다. 특히 삼성전자가 지난해 말 종가 5만3200원으로 전년 대비 32% 하락하며 한국 증시를 끌어내렸다. 지난해 외국인 투자자들은 삼성전자에서만 약 11조원을 뺐다.

◇“주주 환원 적극적 기업에 구체 인센티브 없어 문제”

다만 밸류업의 일부 성과도 있었다. 지난해 자사주 매입 규모는 전년(8조2000억원) 대비 129% 증가한 18조8000억원을 기록했다. 자사주 매입 등 밸류업 공시를 한 기업들의 연초 대비 작년 말까지 평균 수익률은 3.2%로 작년 코스피 수익률(-9.6%)을 초과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주주 환원을 적극적으로 하는 기업에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하는데 구체적 인센티브가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서 “세제 혜택 등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올해 속도감 있게 추진돼야 밸류업 프로그램의 성과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PBR(주가순자산비율)

PBR은 주가를 장부 가치로 나눈 것으로, 숫자가 작을수록 기업 가치가 저평가됐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