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공시가격을 시세 대비 얼마로 할지(현실화율), 또 이 같은 목표치를 언제까지 달성할지 등을 담은 지난 문재인 정부의 ‘공시가격 현실화율 로드맵(중장기 계획)’을 사실상 폐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시가격은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 건강보험료 등 각종 부담금을 부과하는 기준으로, 아파트·단독주택·토지 등 부동산 자산을 대상으로 산정한다. 현재는 시세의 70% 수준인데, 2020년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보유액에 따라 공평한 부담을 지우겠다”며 공시가격을 2035년까지 시세의 9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로드맵’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공시가격 현실화율 인상에 따라 국민 부담이 늘어나고, 시세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공시가격만 오르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자,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당분간 인상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작년 71.5%였던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올해 69%로 낮췄는데, 내년뿐 아니라 당분간 공시가격 현실화율은 이 수준에서 유지될 가능성이 커졌다. 정부는 20일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관련 공청회’를 연 데 이어, 조만간 ‘중앙부동산가격공시위원회’를 열어 내년 공시가격에 적용할 기본 방침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래픽=박상훈

◇”공시가격 현실화율, 근본 재검토”

조세재정연구원의 송경호 정부투자분석센터장은 20일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공청회’ 주제 발표에서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을 부분적으로만 개선해서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공시가격 현실화율 로드맵에 대해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조세재정연구원은 정부로부터 공시가격 현실화 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받아 지난 6개월 동안 제도 개선 방안에 대해 연구해 왔다.

공시가격은 보유세(재산세 및 종합부동산세)와 건강보험료·기초연금 등 67가지 행정제도의 기초 자료로 사용되는 중요 지표다. 2020년 10월 문재인 정부는 ‘공시가격을 최장 2035년까지 시세 대비 90%까지’ 끌어올리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부동산 정책 실패로 인한 집값 폭등으로 공시가격이 뛰어올라 국민 부담이 크게 늘었다.

지난해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초 ‘공시가격 현실화율’의 폭과 속도를 조절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현실화율 목표는 시세 대비 90%에서 80%로 낮추고, 달성 기간은 2035년에서 2040년으로 늦추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했다. 그리고 작년 71.5%였던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올해엔 2020년 이전 수준인 69%까지 낮췄다.

이번에 한발 더 나아가 정부 용역을 맡은 조세재정연구원은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며 사실상 현실화율 인상 로드맵을 폐기해야 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공청회 토론에 나온 정수연 제주대 교수는 “현재 현실화율 로드맵은 사실상 ‘증세 로드맵’으로 시장이 침체하고 납세자가 고통스러워해도 계속 공시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게 돼 있어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년도 ‘원 포인트 조정’ 할 듯

정부가 사실상 ‘공시가격 현실화율 로드맵’ 폐기를 결정한 것은 공시가격 인상으로 국민 부담이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011~2020년 연평균 3.02% 상승했던 공동주택 공시가격은 문재인 정부의 현실화 계획 시행 후인 2021~2022년 연평균 18.12% 올랐다. 당시 집값 급등에 현실화율 인상이 기름을 부은 것이다. 더구나 지난해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집값이 가파르게 떨어졌지만, 전년도 시세를 기준으로 매기는 공시가격은 오히려 올라, 실거래가격보다 공시가격이 높아지는 ‘역전 현상’까지 속출했다. 조세연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기존 로드맵을 따를 경우 전체 공동주택(1486만가구)의 6.9%인 103만 가구가 올해 시세가 하락했음에도 공시가격은 오히려 상승할 것으로 전망됐다.

송 센터장은 “현실화율 하향 조정이나 목표 달성 기간 연장만으로는 현실화 계획의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정부는 공청회 논의 내용을 토대로 이달 중 중앙부동산가격공시위원회를 열어 내년 공시가격에 적용할 조치를 발표할 예정이다. 정부가 현실화율 로드맵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하면서 내년도 공시가격 현실화율 역시 올해처럼 원 포인트로 조정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박합수 건국대 겸임교수는 “올해 수도권 집값은 오른 반면 부동산 시장 전반은 여전히 불안정한 점을 감안하면 내년 공시가격 현실화율도 올해 수준에서 동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공시가격

부동산 가격공시법에 따라 정부가 조사·평가해 공시하는 부동산 가격을 뜻한다. 종합부동산세·재산세 등 각종 세금 부과는 물론 건강보험료 산정, 기초 연금·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 등 60여 분야의 판단 기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