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우주의 심연(深淵) 블랙홀(black hole)이 사상 처음으로 인류에게 사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영화다. 과학자들이 10년에 걸쳐 블랙홀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주는 짧은 동영상을 발표했다. 사진을 이어 붙인 것이지만 블랙홀의 검은 중심 주변으로 빛이 요동치는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났다.
사건 지평선 망원경(EHT) 국제공동연구진이 지난 23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천체물리학 저널’에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처녀자리 은하 중심에 있는 M87 블랙홀의 변화를 영상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5차례 관측 데이터로 블랙홀 변화 추적
블랙홀은 사물을 끌어당기는 힘인 중력이 엄청나게 강해 모든 물질을 빨아들이는 천체다. 지난해 한국천문연구원 등 전 세계 연구 기관 20여곳이 참여한 EHT는 빛조차 빠져 나오지 못하는 블랙홀의 실제 모습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빛이 없으면 사물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당시 발표한 사진은 블랙홀 자체가 아니라 강력한 중력에 의해 휘어진 빛이 만든 블랙홀의 그림자였다. 그림자 크기는 지름이 약 1000억㎞이고, 실제 블랙홀 지름은 400억㎞로 추정됐다.
EHT 연구진이 지난해 발표한 영상은 2017년에 하와이에서 칠레,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8군데 전파망원경이 협력한 결과였다. 하지만 EHT는 M87 블랙홀을 2009년부터 관측했다.
연구진은 2009, 2011, 2012, 2013년 관측 결과를 2017년 영상과 비교해 블랙홀이 시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2009~2013년 관측 결과는 사진을 만들 정도의 해상도가 되지 않아 2017년 사진을 만든 수학 모델로 부족한 부분을 합성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M87 블랙홀은 지구에서 5500만 광년(1광년은 빛이 1년 가는 거리로 약 9조4600억㎞) 떨어져 있으며 질량은 태양의 65억배에 이른다. 10여 년에 걸친 블랙홀의 변화상은 100년 전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 예측한 것과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들어맞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블랙홀은 중력이 워낙 강해 주변의 시공간(時空間)을 휘게 한다. 볼링공이 떨어져 매트리스가 움푹 들어가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시공간이 휘면 블랙홀 뒤쪽을 도는 물질에서 나오는 빛도 앞으로 휘어져 나온다. 이렇게 블랙홀을 앞뒤로 둘러싼 물질을 다 확인하면 블랙홀 윤곽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보자기가 감싸고 있는 모양을 보고 그 안의 물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것과 같다.
블랙홀 영상은 블랙홀 자체가 아니라 그 주변을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물질에서 나온 빛이다. 이 물질과 블랙홀 경계면이 바로 이번 프로젝트 이름이기도 한 ‘사건 지평선(event horizon)’이다. 물질들이 이곳을 넘어 블랙홀로 빠지면 영원히 돌아 나오지 못한다.
동영상을 보면 위치는 달라지지만 계속 블랙홀의 한쪽이 밝게 보인다. 사건 지평선에 다가간 물질은 빛에 가까운 속도로 공전하며 블랙홀로 끌려 들어간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이렇게 회전하는 물질의 원반 중 지구를 향해 움직이는 부분은 지구에서 멀어지는 부분보다 더 밝게 보인다. 이른바 도플러 효과 때문이다. 구급차가 가까이 올수록 사이렌 소리가 커지고 지나치면 소리가 작아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코로나로 올해 관측 무산, 내년 재시도
블랙홀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주변 환경이 달라질 뿐이다. 연구진은 수주일 단위로 강력한 자기장이 블랙홀을 요동 시켜 한쪽이 더 온도가 높게 한다고 밝혔다.
2018년 다른 연구진은 궁수자리A 블랙홀 주변에서 뜨거운 가스가 회전한다는 증거를 발표했다. 이 변화는 1시간 간격으로 일어났다. M87 블랙홀이 태양 질량의 65억배인 데 비해, 궁수자리 A 블랙홀은 1000배에 그친다. 그만큼 더 빨리 변한다.
EHT 과학자들은 올 3~4월 M87 블랙홀과 궁수자리 A 블랙홀을 다시 관측하려고 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발목을 잡았다. 과학자들은 내년에 그린란드와 프랑스에 있는 전파망원경을 추가해 다시 관측을 시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