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가 가위로 유전자 일부를 잘라내는 모습. 눈에 보이지 않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실제 가위 모양은 아니지만 효소를 이용해 원하는 유전자를 잘라낼 수 있다./노벨 재단

올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가 하루 걸리던 코로나 검사를 단 5분으로 줄인 진단 기술을 개발했다. 유전자 증폭 과정이 필요한 기존 검사와 달리 고가 실험 장비 가 필요 없어 언제 어디든 검사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지는 8일(현지 시각)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제니퍼 다우드나 교수 연구진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고가의 실험 장비 없이 진료실이나 학교, 사무실에서 단 5분만에 코로나 바이러스 유무를 확인하는 진단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다우드나 교수는 전날 에마누엘 샤르팡티에 독일 막스플랑크 병원체 연구소장과 함께 ‘크리스퍼 캐스 9’ 유전자 가위를 개발한 공로로 올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유전자 가위로 바이러스 RNA 찾아내

다우드나 교수와 샤르팡티에 소장은 2012년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DNA에서 원하는 부위를 자유자재로 잘라낼 수 있는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 가위 기술을 발표했다. 이 기술은 특정 DNA를 찾아가 지퍼처럼 결합하는 유전물질인 가이드 RNA와, 결합 부위를 잘라내는 효소 단백질인 캐스9으로 구상된다.

코로나 대유행 이후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진단 기술을 연구했다. 지난 5월 두 연구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1시간 안에 코로나 바이러스 유무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는 24시간이 걸리는 기존 유전자 증폭 진단법보다 훨씬 빠른 속도이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개발해 올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제니퍼 다우드나 교수./NIH

다우드나 교수 역시 수 개월 동안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코로나 진단에 적용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번 진단법은 처음 개발한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 가위를 일부 변형했다.

먼저 가이드 RNA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있는 염기 20개 정도의 RNA에 결합한다. 염기는 유전물질인 RNA의 뼈대를 이루는 물질이다.

가이드 RNA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RNA에 결합하면, 캐스13이란 효소 단백질이 형광(螢光) 입자가 붙어 있는 RNA 가닥을 잘라낸다. 이러면 형광 입자가 레이저를 받고 빛을 낸다. 육안으로 간단하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우드나 교수 연구진의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진단은 기존 진단과 달리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증폭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고가의 실험 장비가 필요 없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이용한 코로나 진단법. 가이드 RNA(붉은색)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RNA(검은색)에 결합하면 효소 단백질이 형광 입자가 붙은 다른 RNA 가닥을 잘라낸다. 형광 입자가 레이저를 받고 빛을 내면 육안으로 코로나 바이러스 유무를 확인할 수 있다./UC버클리


◇형광 세기로 바이러스 실제 양도 확인

연구진이 논문 사전 출판 사이트인 메드아카이브(medRxiv)에 올린 논문을 보면 가이드 RNA 한 가닥을 이용하면 검체 용액 1마이크로리터(100만분의 1리터, 1000밀리리터) 당 10만 개의 바이러스를 검출할 수 있다. 만약 가이드 RNA를 하나 더 추가하면 1마이크로리터 당 바이러스 100개까지 검출할 수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UC버클리 연구진이 메드아카이드에 발표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코로나 검사법.]

물론 정밀도는 기존 유전자 증폭 검사보다 떨어진다. 기존 진단은 1마이크로리터 당 1개의 바이러스까지 검출할 수 있다. 하지만 시험 검사에서 정확도를 입증했다.

논문의 공동 저자인 UC샌프란시스코의 멜라니 오트 교수는 “고가의 실험 장비를 이용한 검사만큼 좋지는 않다”면서도 “새로운 진단법은 이미 확진 판정을 받은 검체 5개를 모두 5분 안에 정확하게 양성으로 판정했다”고 밝혔다.

과학계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검사가 코로나 진단의 속도전을 이룰 수 있다고 기대한다. UC산타바버라의 맥스 윌슨 교수는 사이언스에 “이번 검사법은 가위를 냈는지 바위인지 바로 알 수 있는 것과 같다”며 “정말 훌륭한 방법”이라고 평가했다.

윌슨 교수는 “특히 기존 진단법과 달리 환자의 바이러스 양을 측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기존 검사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먼저 증폭하기 때문에 환자의 몸 안에 실제로 얼마나 바이러스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반면 이번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검사는 바이러스가 많을수록 형광이 강해진다. 형광을 통해 검체에 바이러스가 얼마나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우드나 교수와 오트 교수는 앞으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검사법을 상용화하겠다고 밝혔다.

◇농업 혁명도 이룰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올해 노벨 화학상을 안겨준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 가위는 원래 박테리아가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면역 체계이다. 박테리아는 자신에게 침입한 바이러스의 유전자 일부를 표식으로 갖고 있다가 나중에 같은 유전자를 가진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바로 효소 단백질로 잘라낸다. 두 과학자는 이를 손상된 유전자를 교정하는 데 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 가위 원리.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가이드 RNA가 특정 DNA에 달라 붙으면 그 자리를 캐스9 효소 단백질이 잘라낸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새로운 생명과학 혁명을 가져올 획기적인 수단으로 주목 받고 있다. 이번 수상자들의 논문이 나온지 이듬해 MIT 펑장 교수와 하버드대 조지 처지 교수, 서울대 김진수 교수가 각각 인체 세포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적용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최근 질병 치료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지난해 중국 연구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을 원천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같은 방법으로 혈액암을 치료했다. 난치성 빈혈 같은 유전병 치료에서도 성과를 보이고 있다.

농업 부문에서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기존 유전자변형농작물(GMO)처럼 다른 생명체의 유전자를 집어넣지 않고 농작물 자체의 유전자를 교정해 병충해와 가뭄에 강하게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