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코믹의 영웅 캡틴 아메리카는 총알도 막아내는 방패를 갖고 있다. 지구 최강의 동물에게도 마블의 영웅 못지 않은 방패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도 과학연구소의 산디프 에스와라파 박사 연구진은 지난 14일(현지 시각) 영국 왕립학회가 발간하는 국제 학술지 ‘바이올로지 레터스’에 “물곰이 형광 색소를 방패 삼아 치명적인 자외선(UV)에 노출돼도 생존할 수 있다”고 밝혔다.
1㎜ 정도로 작은 동물인 물곰은 절지동물의 이웃인 완보동물이다. ‘느리게 걷는 동물’이란 뜻으로, 영어로는 같은 의미의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타르디그레이드(tardigrade)로 불린다. 물속을 헤엄치는 곰처럼 생겼다고 물곰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며, 극한의 환경에서도 살아남아 ‘지구 최강의 동물’로도 불린다.
◇실험실 실수가 낳은 뜻밖의 발견
이번 발견은 우연히 이뤄졌다. 연구진이 실수로 살균용 자외선 램프를 끄지 않았는데, 일부 물곰이 자외선을 받고도 죽지 않은 것이다. 자외선 램프는 1㎡당 1킬로줄의 자외선을 방출했는데, 이 정도면 박테리아나 선충은 5분 안에 죽는다. 다른 물곰도 15분이면 다 죽었다. 사람도 이 정도 자외선에 15분 노출되면 피부에 손상을 입는다.
반면 적갈색을 띠는 물곰은 같은 양의 자외선을 받고도 모두 살았다. 자외선의 세기를 4배로 높여도 적갈색 물곰은 60% 이상 30일 넘게 생존했다.
특이하게 이 물곰은 자외선을 받으면 파랗게 빛이 났다. 연구진은 물곰의 피부에 있는 형광 색소가 치명적인 자외선을 무해한 청색광으로 바꾼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물곰이 뱅갈루루에서 발견된 파라마크로비오투스 속 신종이라고 ‘파라마크로비오투스 뱅갈루루’라는 학명을 붙였다.
연구진은 형광 색소가 자외선을 막는 방패임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물곰과 선충의 몸에 형광 색소를 입히고 자외선을 쏘였다. 그러자 응급용 형광 방패를 단 물곰과 선충도 자외선을 15분이나 받아도 살아남았다. 이전보다 자외선 생존율이 두 배로 늘었다.
연구진은 자외선이 강한 인도 남부의 여름을 견디기 위해 형광 방패를 가진 물곰이 진화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우주에서도 살아남은 최강의 생존력
물곰은 극한 환경에서도 생존하는 동물로 잘 알려졌다. 앞서 200년 된 마른 이끼와 30년 간 냉동 보관된 이끼에 있던 물곰의 알이 부화한 사례도 학계에 보고됐다. 섭씨 영하 273도 극저온이나 151도 고열에도 끄떡없다.
물곰의 생존력은 우주 공간에서도 입증됐다. 대부분 동물은 10~20Gy(그레이) 정도의 방사선량에 목숨을 잃는데 물곰은 5700그레이의 방사선도 견딘다. 유럽우주국(ESA)은 2007년 무인 우주선에 물곰을 실어 우주로 발사했다. 12일 뒤 지구로 귀환한 물곰들에게 수분을 제공하자 일부가 살아났다.
진공 상태의 우주 공간에서 치명적 방사선에 견딘 생명체는 물곰 이전에 이끼와 박테리아밖에 없었다. 동물로는 물곰이 최강인 셈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도 ‘지구에 사는 동물 중 외계 생명체로 가장 적합한 후보’로 물곰을 꼽았다.
물곰은 최근 달에도 갔다. 지난해 4월 발사된 이스라엘의 무인 달 탐사선 베레시트는 3000만쪽에 해당하는 인류의 지식과 DNA 시료를 작은 접시에 담아 갔는데 그 표면에 물곰 수천 마리도 함께 들어갔다. 접시 외부는 합성수지로 밀봉했다. 베레시트는 달 착륙에 실패했지만, 물곰은 아직도 달에서 파란색 방패로 자외선을 막아내며 살아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