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한양대 교수실에서 만난 최제민(43) 생명과학과 교수는 “아들이 아홉 살 때 그린 그림”이라며 스마트폰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보였다. 비뚤비뚤 아빠(최 교수)의 머릿속을 그린 그림이었다. 최 교수 아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아빠의 머릿속엔 컴퓨터와 이메일로 가득 차 있다. 엄마는 1%, 나(아들)는 0.0000001%라고 적었다. 최 교수는 “내가 만날 연구에만 빠져 살면서 놀아주지 않으니 아이가 좀 섭섭했나 보다”고 했다.
최 교수는 전 세계 수천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자가면역질환을 연구하는 면역 과학자다. 자가면역질환은 그동안 수많은 과학자가 연구해왔지만, 근본적인 원인이나 치료법을 밝혀내지 못한 난치병이다. 하지만 최 교수는 우리 몸 안의 방어군인 ‘T세포’의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며 자가면역질환의 작용 원리를 규명, 치료약 개발의 단서를 제공했다. 치료 신약도 개발 중이다.
◇자가면역질환 원인 풀 열쇠 찾아
면역은 인체 방어 시스템이다. 외부에서 병원균이 들어오면 몸 안의 면역세포가 맞서 싸운다. T세포도 면역세포의 일종이다. 문제는 T세포가 병원균이 아닌 우리 몸의 멀쩡한 세포까지 공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병이 자가면역질환이다. 류머티즘 관절염, 루푸스, 다발성 경화증, 궤양성 대장염 등이 대표적이다.
학계에선 그동안 하나의 T세포가 특정 병원균이나 특정 세포만 공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T세포는 일대일로 목표물(병원균·세포)을 정조준해 사살하는 스나이퍼(저격수)에 비유됐다. 주변 다른 T세포는 구경만 해 ‘방관자 T세포’라고 불렸다.
최 교수는 작년 2월 방관자 T세포 역할을 완전히 뒤집는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했다. 방관자 T세포 역시 자기 몸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 면역반응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을 생쥐 실험을 통해 처음으로 규명한 것이다. 처음 몸 안의 특정 세포에 대응해 공격을 시작한 T세포가 방관자 T세포에도 “함께 공격하자”는 신호를 보내면서 자신들의 목표물이 아닌데도 공격해 과도한 염증이 생기고, 자가면역질환을 유발하는 것이다. 최 교수는 “자가면역질환 발병 원인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근본적인 치료 신약을 개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자가면역질환자들이 처방받는 약은 근본적인 치료약이 아닌, 증상을 유지하거나 완화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근본적인 치료법이 개발되면 약 45조원 되는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시장에서 선구자가 될 수 있다.
최 교수는 만성 피부질환인 아토피·건선 치료 약제로 쓰일 수 있는 물질도 개발했다. 피부 조직은 튼튼해 약물 전달이 어려운데 피부 조직을 투과할 수 있는 새로운 물질을 발견한 것이다. 이 연구는 2017년 국내 연구자가 선정한 올해의 연구 성과 톱 5에 들기도 했다. 또한 T세포의 특정 유전자를 이용한 항암 치료 가능성도 발견했다.
◇인류 도움 될 신약 개발 목표
최 교수는 고등학교 선생님이 꿈이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생물학에는 관심조차 없었다고 한다. “생명과학이 미래”라는 부모님의 권유에 생명공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생활도 평범했고, 학업 성적도 그저 그랬다.
그의 인생을 바꾼 건 대학 3학년 때 실험실 생활이었다.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선 필수였는데 그때 생물학에 매력을 느꼈다. 최 교수는 “식품 화학을 연구하는 연구실에 들어갔고, 교과서로 보는 공부와는 다른 실험의 재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렇게 면역학 공부를 시작하게 됐고, 생명공학 석사·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최 교수는 강의를 빼면 연구실에서 거의 시간을 보낸다. 주말에도 집에서 노트북을 펴고 논문을 쓴다. 최 교수는 “집에 있어도 머릿속에선 연구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며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연구를 계속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류에게 도움 될 만한 신약을 개발하고 싶다”며 “신약이 상품화되고 약으로 쓰여서 환자가 치료되는 것을 제 눈으로 볼 수 있으면 과학자로서 보람이 클 것 같다”고 말했다.
기초과학 연구와 더불어 신약 개발을 위해 창업도 준비 중이다. 그는 “오늘 하루하루를 열심히 진실하게 보내면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는 걸 경험해왔다”며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하면 명예로운 일들도 따라오지 않을까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