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김범경(42) 교수는 의사 가운을 입고 기자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그는 “평소엔 이곳에서 간 질환 환자들을 진료한다”고 말했다. 소화기내과 전문의인 김 교수는 병원에서 환자를 보는 것이 주 업무지만, 이를 바탕으로 간암을 예측할 수 있는 모델과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다. 과학자들의 실험실처럼 그에겐 병원이 연구 현장인 셈이다. 간암은 국내 암 사망률 2위다.
간은 우리 몸의 최대 화학공장으로 통한다. 몸에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고 외부에서 들어온 독성물질을 해독한다. 최근 결정된 노벨의학상도 C형 간염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치료 길을 연 의학자 3명(하비 올터 박사, 마이클 호턴 교수, 찰스 라이스 교수)에게 돌아갔다. 김 교수는 “노벨상 수상자들처럼 인류 건강에 이바지하는 연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량적으로 간암 예측할 모델 개발
간염은 A·B·C형이 있다. 급성인 A형 간염은 감기처럼 앓고 지나지만, B·C형은 만성 염증을 일으킨다. 특히 B형은 C형과 달리 마땅한 치료제가 없다. 5~10년간 진행을 늦추는 약을 먹는 방법밖에는 없다. B형 간염으로 만성 염증이 반복되다 보면 간이 딱딱해지는 간경화가 발생하고 더 심해지면 간암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은 B형 간염 백신이 개발돼 있어, 어린 연령층에선 발병이 거의 없지만 30~60대의 3% 정도는 B형 간염 보유자다. 김 교수는 “간경화나 간암에 걸린 환자의 마지막 생은 피를 토하거나 복수가 차는 등 비참하다”며 “B형 간염에 걸린 사람은 건강한 일반인보다 간암에 걸릴 확률이 최대 200배 더 높다"고 했다.
김 교수는 2015년 B형 간염 환자에 대한 간암 예측 모델을 만들었다. 기존에는 초음파나 피검사를 통해 간암을 추적했으나 정밀하지 않았다. 간 조직을 떼어내는 검사법은 확실하긴 하지만 입원이 필요하고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 김 교수는 간섬유화 스캔을 이용했다. 에너지를 보낸 뒤 반사돼서 오는 신호를 통해 간이 얼마나 딱딱해지는지 측정한다. 말랑한 묵보다는 철봉을 치면 소리가 더 잘 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 방법으로 간의 상태를 숫자로 나타내 간경화와 간암을 객관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됐다. 그는 간암 예측 모델과 관련된 논문 20여 편을 쓰면서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한국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적합한 모델로 평가받는다. 김 교수는 “질병을 잘 예측해 조기 발견하고 추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환자의 위험도별로 선별적으로 검사해 사회적 비용도 줄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간암 치료법 연구도 하고 있다. 간암은 5년 생존율이 30~40%에 불과하다. 간암은 재발 자체가 잦은 병이고 치료에도 목돈이 든다. 지금까지 간암의 표준 치료법은 넥사바 같은 약물을 이용한 항암 치료였다. 김 교수는 영상의학과와 방사선종양학과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간암 환자의 생존율을 높이고 있다. 지난 7월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방사선과 항암제를 함께 쓰면 40% 정도의 환자에서 암세포의 크기가 의미 있게 줄어들고 생존율을 2배 정도로 늘릴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김 교수는 환자가 회복될 때마다 뿌듯하고 오히려 잘 버텨준 환자에게 감사하다”며 “모두를 대상으로 할 수 없지만 10분의 1이라도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 생존 기간을 늘릴 수 있다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 “연구한 치료법 널리 퍼지길"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김 교수는 다양한 사람을 치료하고 연구 경험을 쌓고 싶어 개원하지 않고 대학 병원에 남았다. 김 교수는 “간은 침묵의 장기이고 치료제도 많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할 수 있는 분야가 많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 의학계의 연구 상황은 녹록지 않다. 미국 하버드대병원이나 존스홉킨스병원 같은 해외 대형병원 의사들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의사들은 진료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한다. 김 교수도 환자 진료 시간이 60%라면 학생을 가르치는 시간은 20%, 연구하는 시간은 20% 정도다. 연구비 지원도 박한 편이다. 김 교수는 “사립대 의대의 신진 연구자들은 연구비 1억 공모에 지원해서 선정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며 “연구비 지원 대상이 좀 더 확대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환자뿐 아니라 다른 의사들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할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의사들이 진단하기 위해선 확실한 근거에 의해서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학 연구가 필요한 것”이라며 “다른 의사들에게 논문 등을 통해 진료 형태를 퍼트려서 많은 사람이 도움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