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동안 전 세계 실험실을 떠돈 영혼이 있다. 이미 죽었지만 육신의 일부가 불멸(不滅)의 세포가 돼 계속 과학 연구에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느 과학자도 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세계적인 민간 과학연구소가 유족의 동의도 없이 암으로 사망한 흑인 여성의 세포를 실험에 사용한 데 대해 거액의 배상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최근 전 세계로 퍼진 흑인 인권 운동이 과학에서 발생한 인종 편견의 역사까지 청산하고 있는 것이다.
◇휴즈의학연구소, 수십만 달러 배상 결정
미국의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HHMI)는 지난 29일(현지 시각) 헨리에타 랙스의 세포를 사용한 댓가로 그의 이름을 딴 재단에 여섯 자리의 기부금을 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6자리면 10만 달러 이상이니 한화로 치면 수억원대가 된다.
헨리에타 랙스는 전 세계 연구실에서 실험에 쓰고 있는 이른바 ‘헬라(HeLa)’ 세포를 제공한 여성이다. 대형 과학연구기관이 동의 없이 헨리에타 랙스의 세포를 실험에 쓴 데 대해 재정적 배상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51년 의료진은 자궁경부암에 걸린 랙스에게서 암세포를 채취했다. 랙스가 그 해 31세 나이로 죽고 나서 이 세포는 이후 실험실에서 계속 증식하면서 지금까지 전 세계 실험실에서 과학연구에 사용됐다. 암세포의 무한 증식 능력을 이용한 바로 헬라 세포이다.
하지만 암세포를 채취하고 이를 실험에 사용하면서 랙스나 그의 가족 누구에게도 동의를 받지 않았다. 배상도 없었다. 랙스는 자신의 일부가 70년 이상 지상에 남을 것을 모른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의 에린 오시아 소장은 “헬라 세포가 부당하게 획득됐음을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며 “과학과 의학이 공정하게 되기까지 아직 갈 길어 멀다는 사실도 인정한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배상액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의 배상에 대해 랙스의 손녀인 제리 랙스-웨이는 “내가 모든 사람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가족 일부는 이번 배상에 대해 감사한다고 안다”며 “다른 연구소도 이번 선례에 따르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가 촉발
하워드 휴즈 연구소는 올해 미국에서 비무장 흑인 남성이 경찰에 살해되면서 발생한 인권 운동 이후 기부를 결정했다. 세계 최대의 생의학 민간 연구 기관으로서 과학에서 자행된 인종적 블공정 행위를 청산하는 데 다른 연구 기관이 따를 수 있는 선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연구소의 행동은 앞서 여러 과학자들이 헬라 세포 사용에 대해 개인적으로 배상을 한 데서 촉발됐다. 네이처지는 29일 “올 초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의 사마라 렉-피터슨 교수 연구실의 연구자들이 랙스 유족이 참여한 가운데 여러 차례 논의를 가졌다”며 “연구자들은 실험실에서 새로 헬라 세포를 만들 때마다 랙스 재단에 일정액을 기부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연구원들은 과거 실험에 대해서도 기부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랙-피터슨 교수는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의 연구원도 겸하고 있어 연구소의 이번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밖에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프랜시스 콜린스 원장도 올해 템플리튼 상을 받고 상금 일부를 랙스 재단에 기부했다. 하지만 랙스 재단은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의 배상금이 가장 규모가 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