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南美)에서는 9000년 전부터 남녀평등이 이뤄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창을 들고 사냥에 나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발굴된 것이다. 이에 따라 남성은 사냥하고 여성은 채집을 전담했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수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UC데이비스)의 랜디 하스 교수 연구진은 4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페루의 고지대에서 생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냥도구와 같이 매장된 9000년 전 여성의 유골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사냥도구 20여점과 같이 발굴된 여성 유골
하스 교수 연구진은 안데스산맥의 해발 3925m 고원지대에서 석기들과 같이 매장된 유골 2구를 발굴했다. 한 쪽은 나이가 17~19세로, 창이나 칼, 또는 동물 가죽을 처리하는 데 쓰인 긁개에 부착됐을 석기 4점이 같이 있었다. 또 가죽을 무두질하는 데 쓰였던 석기 20점도 넓적다리뼈 바로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어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됐다. 다른 사람은 25~35세로 사냥용 석기 두 점과 같이 발굴됐다. 구덩이에서는 안데스산맥에 사는 사슴과 낙타과 동물의 뼈들도 나왔다.
연구진은 석기들이 가지런히 배치된 모양으로 보아 신분이 높은 남성이 묻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뼈가 가늘고 가벼운 점이 이상했다. 연구진은 법의학 기법을 이용해 유골의 치아 법랑질에서 남녀를 구분하는 아멜로제닌 단백질을 분석했다.
그 결과 20점 이상의 석기들과 같이 있었던 유골은 여성으로 밝혀졌다. 다른 유골은 남성이었다. 탄소, 질소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여성의 치아를 분석했더니 생전 고기를 많이 먹은 전형적인 사냥꾼의 형태를 보였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남성 사냥, 여성 채집 이론에 반기
이번 연구는 학계에 정설로 내려온 남녀 역할론, 즉 사냥을 하는 남성과 열매를 따는 여성이라는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연구진은 이번 발굴 이후 8000년 전보다 오래된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 매장 유골에 대한 보고서를 다시 조사했다. 총 107곳의 유적에서 사냥 도구와 같이 매장된 여성 10명과 남성 16명의 유골이 확인됐다. 하스 교수는 “새로운 발굴 결과와 기존 발굴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고대인의 사냥은 성 중립적인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남성 사냥꾼 가설은 1966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인류 진화 심포지엄에 처음 제기된 후 학계에 정설로 이어졌다. 일부 학자가 고대 여성 전사가 발굴된 점을 들어 반론을 펴기도 했지만, 여성이 사냥을 했다는 확실한 고고학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날도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원시부족인 탄자니아의 하드자족과 남아프리카의 산족 역시 남성만 사냥을 하고 있어 정설을 뒤집기에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성급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미국 와이오밍대의 로버트 켈리 교수는 여성 사냥꾼의 발견을 축하하면서도 이런 사례가 더 많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사이언스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유골과 같이 매장된 사냥 도구가 생전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앞서 여아 유골 두 구가 사냥 도구와 같이 발굴된 적도 있다는 것이다. 매장품은 생전 사용한 물건일 수도 있고 예식용으로 넣었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