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는 표면에 돋아 있는 스파이크 단백질(붉은색)을 인체 세포의 ACE2 수용체 단백질(파란색)에 결합시켜 감염된다. 이 과정은 라마의 소형 항체와 유사한 합성나노항체(검은색)를 바이러스 스파이크에 먼저 결합시켜 차단할 수 있다./EMBL

과학자들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을 유발하는 바이러스(SARS-CoV-2)가 인체 세포에 달라붙지 못하게 하는 새로운 무기를 개발했다. 사람 몸에서 생산되는 면역단백질인 항체(antibody)와 같은 일을 하면서도 훨씬 크기가 작은 항체를 합성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세포 실험에서 입증된 효능이 사람에서도 나타나면 코로나 치료와 단기 예방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라마 몸에서 찾은 코로나 항체 치료제

코로나 감염은 바이러스의 돌기(스파이크) 단백질과 인체 세포 표면의 ACE2 수용체 단백질 사이의 결합에 달려있다. 바이러스는 스파이크 단백질에 있는 손가락과 같은 3개의 돌출부를 ACE2에 결합시켜 세포에 들러붙는다. 이 돌출부는 ‘수용체 결합 도메인 (RBDs)’이라고 불린다. RBD를 차단하면 바이러스가 인체 세포에 침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인체에서 항체가 바로 그런 일을 한다.

유럽분자생물학연구소(EMBL) 연구진은 4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라마나 알파카 같은 낙타과 동물에서 생산되는 소형 항체인 나노항체(nanobody)를 모방해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포 감염을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나노항체는 크기가 인간 항체의 4분의 1에 불과해 바로 호흡기로 흡입할 수 있다. 호흡기에 감염되는 코로나 바이러스 치료에 안성맞춤이다. 유사시 병원에 가지 않고도 환자가 직접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나노항체를 직접 낙타과 동물에서 채취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앞서 과학자들은 나노항체를 인공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바로 합성나노항체(sybody)이다. 또 스위스 취리히대의 마르쿠스 시거 교수 연구진은 최근 합성 나노항체를 신속하게 골라내는 기술을 개발했다. EMBL 연구진은 두 연구 성과를 토대로 새로운 코로나 치료법을 개발했다.

안데스 산맥에 사는 낙타과 동물인 라마는 사람 항체의 4분의 1 크기인 나노항체를 만든다. 과학자들은 이를 이용해 코로나 바이러스 침입을 차단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위키미디어

◇바이러스 잡는 최적의 나노항체 선별

유럽분자생물학연구소(EMBL) 독일 함부르크 분원의 크리스천 로우 박사 연구진은 기존의 합성나노항체들 가운데 코로나 바이러스에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을 찾았다.

먼저 연구진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RBD를 미끼처럼 사용해 이곳에 결합하는 합성나노항체들을 선별했다. 다음에는 선별된 합성나노항체들을 안정성과 효능, 결합 정밀도를 기준으로 시험했다. 그 결과 합성나노항체 23이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RBD를 차단하는 효과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EMBL의 드미트리 스베르군 박사 연구진은 합성나노항체 23이 바이러스의 RBD와 어떻게 결합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X선 산란 기술로 결합 형태를 분석했다. 이와 함께 스웨덴 카롤린스카연구소의 마틴 할베르그 박사 연구진은 초전온 전자현미경으로 합성나노항체 23과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이 결합한 전체 구조를 확인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RBD는 두 가지 형태를 오간다. ‘업(up)’ 상태에서는 RBD가 손가락을 뻗듯 밀려 나와 인체 세포의 ACE2와 결합할 준비를 한다. ‘다운(down)’ 상태에서는 RBD가 접혀 인체 면역체계를 피한다.

EMBL 연구진은 합성나노항체 23은 바이러스 RBD의 업과 다운 두 형태 모두 결합해 ACE2와의 결합을 차단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처럼 RBD의 형태와 상관없이 차단할 수 있는 능력은 합성나노항체 23이 왜 바이러스 차단 효과가 뛰어난지 설명해준다.

마지막으로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벤저민 머렐 교수 연구진은 합성나노항체 23이 바이러스에 결합해 세포 침입을 막는 중화(中和) 능력이 있는지 알아봤다. 먼저 다른 병원성 바이러스인 렌티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변형해 표면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이 생기게 했다. 연구진은 합성나노항체 23이 렌티바이러스의 스파이크에 결합해 무력화시키는 것을 확인했다.

◇봉쇄시기 과학 협동 연구의 성과

이번 연구를 이끈 크리스천 로우 박사는 “요즘은 서로 협력하려는 분위기가 워낙 높아서 누구나 연구에 기여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EMBL 상층부로부터 코로나 대유행 사태 이후 봉쇄된 실험실을 다시 열어도 된다는 허가를 받지 마자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후 연구진은 불과 수주 만에 합성나노항체 후보군을 선별하고 분석 작업을 수행했다.

로우 박사는 “연구 방법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무관한 다른 프로젝트에서 이미 확립된 것이어서 그렇게 빨리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며 “만약 연구 도구들을 새로 개발해야 했다면 시간과 자원이 엄청나게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코로나 치료의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다. 연구진은 앞으로 합성나노항체 23이 효과적인 코로나 치료법이 될 수 있는지 확증할 추가 분석 연구를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라마에서 추출한 항체로 만든 분무형 항체 치료제 '에어로나노항체(AeroNabs)'./UCSF

◇미국, 벨기에서도 나노항체 연구성과 나와

라마의 나노항체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UCSF) 연구진은 라마의 나노항체를 이용해 호흡기로 흡입할 수 있는 코로나 치료제를 개발해 전임상 시험에서 효능을 확인했다.

아시시 맨글릭 UCSF 교수 연구진은 당시 논문 사전 출판사이트 ‘바이오아카이브(bioRxiv)’에 먼저 발표한 논문에서 라마의 나노항체를 분무형으로 개발해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에 결합하는 능력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특히 나노항체 3가지를 연결해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을 이루는 RBD 세 부분에 모두 결합하도록 했다. 3중 나노항체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를 이루는 세 부분에 모두 결합해 단일 나노항체보다 결합 차단 효과가 20만 배나 높았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벨기에 엑스비르 바이오(ExeVir Bio)사도 라마의 나노항체를 이용해 코로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지난 5월 벨기에 플랑드르 생명공학 연구소(VIB)의 크사비르 살런스 교수진은 국제 학술지 ‘셀’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무력화할 수 있는 항체를 라마에서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엑스비르 바이오는 VIB에서 창업했다. 회사는 올 연말까지 라마 항체의 임상시험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