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의 모형도. 바이러스는 표면의 돌기(스파이크, 붉은색) 단백질을 인체 세포에 결합시키고 안으로 침투한다. 영국 과학자들이 바이러스가 결합하는 새로운 표면 단백질을 찾아내 치료제 개발의 전기를 마련했다./CDC

영국에서 발생한 변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미 면역력이 저하된 암환자에서 출현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23일(현지 시각) “과학자들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암환자의 몸에서 면역세포들의 공격을 덜 받으며 자유롭게 돌연변이를 일으켰다고 본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가 코로나에 감염되면 다른 감염자보다 더 세밀한 치료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바이러스학자인 라빈드라 굽타 교수는 지난 19일 의학 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인 메드아카이브에 “코로나에 감염된 암환자에서 최근 영국에서 퍼지고 있는 변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돌연변이 바이러스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면역력 약한 환자 몸에서 바이러스 진화

굽타 교수는 지난 6월 림프종에 걸린 암환자가 코로나에 감염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환자는 항암제 처방을 받았는데, 이 약은 항체를 생산하는 B세포를 공격한다. 항체는 바이러스에 결합해 무력화시키는 면역단백질이다.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는 항체 걱정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환자는 8월 사망했다. 항바이러스제인 렘데시비르나 코로나 완치자에서 추출한 혈장을 투여해도 소용이 없었다. 굽타 교수는 이 환자의 몸에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는 항체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변이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영국에서 퍼진 변이 코로나 바이러스 B.1.1.7은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 17개가 전과 달라졌다. 그 중 8개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의 구성 성분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스파이크 단백질을 숙주 세포 표면의 ACE2 수용체에 결합시켜 침투한다. 과학자들은 바이러스 감염의 열쇠인 스파이크에서 일어난 아미노산 변이 중 특히 3가지가 문제라고 꼽았다.

굽타 교수가 찾은 69-70del 변이는 스파이크 단백질에서 아미노산 두 개가 빠진 것이다. 다른 바이러스에 이런 변이 스파이크 단백질이 만들어지게 했더니 인체 세포에 두 배나 더 잘 감염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는 N501Y이다. 미국 프레드 허치슨 암연구소의 제시 블룸 박사는 이 변이가 코로나 바이러스와 숙주 세포 ACE2 수용체와의 결합력을 더 높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변이 바이러스는 최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발견됐다.

세 번째는 P681H 변이다. 스파이크 단백질은 숙주 세포에 결합 후 효소에 잘리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이 변이는 스파이크의 절단 부위를 바꿨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SARS-CoV-2)와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를 유발한 바이러스(SARS-CoV-1)도 같은 스파이크 절단 부위가 달라졌다. 과학자들은 이 변이로 바이러스가 더 쉽게 퍼졌다고 본다.

코로나 바이러스 돌연변이 D614G의 스파이크 단백질 구조. 바이러스는 이 단백질로 숙주세포에 결합한다. 유전자 염기 하나가 달라지면서 스파이크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하나가 D에서 G로 바뀐다(위). 그 결과 스파이크의 구조가 열린 형태가 되고 감염력이 높아진다(아래)./네이처

◇독감 바이러스도 환자에서 악성으로 변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이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미노산 하나가 뒤바뀐 D614G가 대표적이다. 과학자들은 중국 우한에서 첫 코로나 환자가 나온 이래 25가지의 돌연변이체를 발견했다. 한 달에 두 건 꼴로 변이체가 나온 셈이다. 하지만 영국 변이 바이러스는 돌연변이 속도가 너무 빨랐다.

과학자들은 이런 돌연변이가 면역력이 약해진 환자의 몸이라는 특수환 환경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미국 유타대의 스티븐 골드스타인 교수는 사이언스지에 “정상적인 진화 환경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너무 많은 변이가 축적됐다”며 “이는 한 숙주 안에서 오래 있으면서 진화가 일어난 결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하버드 보건대의 윌리엄 하니지 교수 연구진도 지난 3일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MEJM)’에 면역체계가 약해진 사람이 바이러스에게 돌연변이를 축적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면역력이 이미 떨어져 있던 보스턴의 한 환자는 코로나 감염 후 154일 만에 사망했는데, 그 사이 영국 변이 바이러스에서 나온 N501Y와 같은 돌연변이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환자는 항체 치료를 받았지만 변이 바이러스에겐 소용이 없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변이 바이러스는 감염력이 70%나 높다고 영국 정부는 밝혔다. 과학자들은 바이러스의 감염력이 실제로 높아졌는지, 아니면 단순히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서 바이러스가 퍼졌기 때문인지 실험을 통해 밝혀야 한다고 판단을 유보했다.

하지만 변이 바이러스가 감염력이 더 높아지는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프레드 허치슨 암연구소의 제시 블룸 박사는 2017년에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의 몸에서 다수의 변이를 일으켜 나중에 전 세계로 퍼졌다고 밝혔다. 과학자들은 기존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결핵 환자를 다른 환자와 달리 치료하듯, 면역력이 떨어진 감염자는 특별 치료를 해야 변이 바이러스를 양산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10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제니차에서 촬영한 화이자의 로고와 코로나19 백신 모습/연합뉴스

◇바이오앤테크, “코로나 백신 효과엔 문제 없어”

다행히 변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백신에 듣지 않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과학자들은 본다. 미국 화이자와 코로나 백신을 공동 개발한 독일 바이오앤테크의 위구르 사힌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영국의 변이 바이러스는 우리 백신이 만들 스파이크 단백질과 1270개 아미노산 중 9개만 다르다”며 “과학적으로 우리 백신이 유도한 면역반응이 이 변이 바이러스에도 들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악의 경우라도 화이자/바이오앤테크와 모더나의 코로나 백신은 바이러스의 돌연변이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두 회사의 백신은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스파이크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인공 합성해 지방입자에 싸서 인체에 주입하는 형태다.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변이가 발생하면 바로 백신에 쓰는 유전자를 바꿔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