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동굴에서 현생 인류가 4만5000여년 전에 그린 멧돼지 그림이 발견됐다. 연구진은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 벽화이자 사물의 형태를 구분할 수 있는 구상화(具象畵)로는 최초의 그림이라고 밝혔다.
호주 그리피스대의 애덤 브럼 교수 연구진은 13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의 한 석회암 동굴에서 멧돼지 세 마리가 그려진 벽화와 사람의 손도장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술라웨시섬은 그동안 4만년도 더 된 동굴 벽화가 잇따라 발견됐다. 하지만 이번 벽화는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동물 벽화보다 최소 1000년은 앞선다. 그리피스대 연구진은 2019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역시 술라웨시섬의 한 동굴에서 4만4000년에 인간이 들소와 멧돼지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인류 최고의 사냥도를 발견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현생 인류 이주 과정 보여주는 새로운 증거
브럼 교수 연구진은 우라늄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으로 벽화를 그린 시기를 확인했다. 동굴벽화는 황토 같은 광물성 무기물 물감으로 그린 것이 대부분이어서 유기물인 탄소를 기준으로 하는 탄소연대측정법이 통하지 않았다. 대신 연구진은 동굴 벽화 위에 물이 스미면서 생긴 방해석 막에서 우라늄을 추출했다. 우라늄이 시간이 지나면서 방사선을 방출하고 토륨으로 변환 비율을 통해 연대를 측정했다.
방해석 막은 최소 4만5500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벽화는 그보다 더 오래됐다고 볼 수 있다. 브럼 교수는 “현생 인류의 동굴 벽화는 지금까지 생각처럼 빙하기 유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류 이주 과정에서 더 오래된 시점에 시작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밝혔다.
동굴에 그려진 멧돼지는 길이가 1미터를 넘는다. 이 돼지는 일부분만 그려진 두 마리 돼지와 마주 보고 있다. 사람이 손을 대고 물감을 뿌려 만든 손도장도 보인다. 그림은 붉은 황토 염료로 그려졌다.
돼지는 얼굴에 사마귀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술라웨시섬 토종 멧돼지로 추정된다. 브럼 교수는 “멧돼지가 자주 그려진 것은 인간이 현지 동물의 행동 생태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라며 “세계 다른 동굴에서 발견된 구상화들을 현생인류가 그렸다는 점에 비춰 이들 그림도 현생인류가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영국 더램대의 폴 퍼티트 교수는 뉴사이언티스트 인터뷰에서 “이번 발견은 동남아시아의 섬에 인류가 오래 전부터 거주했음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라며 “초기 인류는 아프리카를 떠나와 이곳의 섬들을 지나 6만5000년 전 호주까지 도착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퍼티트 교수는 “아직 당시 이 지역에 살았던 인류의 화석 증거가 불충분해 네안데르탈인 같은 다른 인류가 벽화를 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