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C녹십자랩셀은 지난 1월 미국 관계사 아티바와 함께 2조원대 기술 수출에 성공했다. 미국 제약사 MSD와 총 세 가지 고형암(장기에 생기는 악성 종양)에 대한 CAR-NK 세포치료제 공동 개발을 위한 계약을 한 것이다. CAR-NK 치료제는 암세포 같은 비정상 세포를 파괴하는 면역세포인 NK(자연살해) 세포에 특정 암세포에만 달라붙는 CAR(키메라 항원 수용체)을 붙인 것이다.

이번 성과가 주목받은 건 신약 후보물질 하나를 수출한 것이 아니라 여러 신약을 개발하는 토대가 될 플랫폼 기술을 수출했기 때문이다. 한 기술로 다양한 의약품을 개발할 수 있는 플랫폼 기술이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새로운 먹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플랫폼 기술을 보유한 국내 바이오 기업들이 잇따라 대규모 기술 수출에 성공하고, 코로나 백신에도 플랫폼 기술이 적용되며 발 빠르게 전염병에 대응했다.

◇바이오기업들 수조원대 기술수출 성과

플랫폼 기술은 여러 신약 개발에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약물과 전달체를 합치거나 약물의 형태를 바꾸고, 흡수 효율을 높이는 기술들이다. 즉 플랫폼 기술을 적용하면 같은 약물이라도 여러 신약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그만큼 범용성이 크다. 기술 개발만 성공한다면 여러 제약사에 다양한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신약 기술을 이전할 수 있다.

최근 국내 바이오 기업들이 플랫폼 기술로 잇따라 성과를 내고 있다. 레고켐바이오는 ‘항체-약물 접합체(ADC)’라는 플랫폼 기술을 가지고 있다. ADC는 약물에 특정 암세포의 항원 단백질을 공격하는 항체를 붙인 것이다. 덕분에 유도 미사일처럼 암세포만 찾아가 약물을 전달해 죽일 수 있다. 회사는 지난해 영국 익수다 세러퓨틱스에 최대 7700억원 규모로 ADC 기술을 수출했다. 이를 포함해 지난해 기술 수출은 총 4건으로 1조5000억원대 규모다. 회사 설립 후 지금까지 성사된 기술이전 계약은 국내외에서 총 10건이며, 계약 규모는 비공개된 금액을 제외하더라도 2조원이 넘는다.

알테오젠은 정맥주사를 피하주사 형태로 바꿔주는 기술을 갖고 있다. 피하주사는 인슐린처럼 환자가 혼자 주사할 수 있어 정맥주사보다 편리하다. 회사는 총 3건의 기술 수출 계약을 달성했다. 최대 6조4000억원 규모다. 이동건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연내 추가적인 대규모 후속 계약도 기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주사가 먹는 약 되고, 약효 기간도 늘어

플랫폼 기술의 성공 사례가 이어지자 바이오 기업들이 이 분야로 뛰어들고 있다. 셀리드는 항암 면역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회사가 개발한 전달체에 암세포 항원만 교체하면 다양한 암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 최근엔 암세포 항원을 넣는 자리에 코로나 바이러스 항원을 대신 넣어 코로나 백신을 개발 중이다.

셀리버리는 분자량이 큰 단백질을 세포막을 통과시켜 세포 안으로 전송하는 약물 전송 기술로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 등을 만들고 있고, 에이비엘바이오는 서로 다른 항체 2개를 붙이는 이중 항체 기술을 개발했다.

바이오 기업뿐 아니라 전통 제약사들도 플랫폼 기술 개발에 나서고 있다. 종근당은 다양한 염증성 질환에 영향을 미치는 단백질을 억제하는 기술로 희소 질환인 샤르코 마리 투스병과 자가 면역 질환을 치료할 신약들을 개발 중이다. 한미약품은 주사용 항암제를 먹는 약으로 바꾸는 기술과 단백질 의약품의 약효를 지속시키는 기술 등을 가지고 있다. 이 기술은 암 환자의 백혈구 감소를 막는 바이오 신약 개발에 적용됐다.

◇코로나 백신 개발 속도전에도 한몫

플랫폼 기술은 이번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에서도 빛을 발했다. 이미 개발된 백신 제조 기술에 바이러스의 특정 항원이나 유전 정보만 바꿔서 새로운 전염병에 맞는 백신을 만들 수 있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반 기술이 있기 때문에 개발 시간이 단축된다는 장점이 있다.

미국 화이자와 모더나,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등도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플랫폼을 활용해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코로나 환자가 발생한 후 1년 남짓 되는 시간에 백신이 개발됐는데, 이는 신약 개발이 보통 10~15년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속도다.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는 보고서를 통해 “안전성이 검증된 플랫폼에 바이러스 유전물질을 넣어 개발 기간을 단축했다”라며 “플랫폼 기술 등 다양한 기초·기반 연구·개발의 중요성이 부상했다”고 했다.

정부가 국산 백신 개발을 끝까지 지원하려는 이유도 플랫폼만 구축되면 앞으로 코로나 같은 새로운 전염병이 와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의 경우엔 감염병 유행이 끝나자 백신 개발이 종료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