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백신 공장' 인도에 비상이 걸렸다. 세계 최대 백신 위탁 생산(CMO) 업체인 인도혈청연구소가 미국의 금수 조치로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미국 노바백스 백신의 생산을 중단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자국 내 코로나 백신 비축분을 늘리려는 미국 정부는 한국 6·25전쟁기에 제정한 국방물자생산법을 발동, 백신 제조와 관련된 37개 원료와 장비의 수출을 통제하고 나섰다. 한 달에 코로나 백신 1억6000만회 접종분을 생산하던 인도혈청연구소는 금수 조치가 지속될 경우 4~6주 내에 대규모 생산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다급해진 이 회사 다르 푸나왈라 대표는 지난 16일 트위터를 통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에게 “코로나 백신 원료 금수 조치를 해제해달라”고 호소했다.
선진국들의 백신 무기화가 본격화하고 있다. 화이자·모더나 같은 미국산 백신이 아니라도, 미국이 옥죄면 코로나 백신 생산이 안 되는 냉엄한 현실을 인도의 사례가 보여준다. 인도에 이어 유럽의 백신 생산도 원료 부족으로 차질이 생기면서 해외 공급이 막히고 있다. 백신 확보에 뒤처진 한국으로선 안정적인 백신 확보를 위해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산업계에서는 한국 경제의 사활이 걸린 백신 확보를 위해 우리가 경쟁력을 가진 반도체와 배터리를 지렛대 삼아 미국의 첨단 백신과 그 기술을 확보하는 빅딜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한다.
◇제2의 코로나 대비해 RNA 백신 생산을
한국이 목표로 삼아야 할 백신은 미국 화이자와 모더나가 개발한 mRNA(전령RNA) 백신이다. 두 백신은 미국과 유럽에서만 생산된다. 최근 아스트라제네카와 미국 얀센의 코로나 백신이 혈전 부작용을 보이면서 두 회사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높아지고 있다. 일본은 백신 구매 협상에서 장관 말고 총리가 나서라는 화이자의 요구에도 군말 없이 응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다른 백신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mRNA 백신은 생산이 불가능하다. 이번에 처음 상용화된 방식이어서 기술 이전이 아니면 복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용홍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1차관은 “mRNA 백신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유전자 설계가 모두 특허 기술이어서 당장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결국 미국과 협력해 mRNA 백신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전문가들은 기술 이전이 최선이지만 위탁 생산분의 일부를 국내에서 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CMO 계약이라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코로나 대유행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면서 5년 뒤까지 내다본 원천 생산 기술 확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코로나 백신 접종이 올해뿐 아니라 독감 백신처럼 향후 수년간 매년 접종해야 한다면 이번에 자체 생산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ESG 경영 개념에서 대기업 투자 필요
새로운 백신 생산 라인 구축은 최근 대기업들에 화두가 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차원에서 진행될 수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통해 국제기구와 함께 코로나 백신 개발에 수조 원대 투자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전염병 대유행 시대에 백신을 공급하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사회 공헌 활동”이라고 말했다.
제약·바이오 업계는 반도체와 배터리 빅딜에 참여한 대기업들이 삼성바이오로직스나 SK바이오사이언스 등 기존 대기업 백신 생산 시설에 투자하면 이르면 6개월 내 mRNA 백신 생산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기존 바이오 의약품 공장을 mRNA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로 바꾸려면 통상 1~2년 걸리지만 한국 업체들의 집중 투자가 있다면 6개월이면 가능하다는 것. 국내 500대 기업이 사회 공헌 사업에 연간 3조원 안팎을 쓴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기업이 협력하면 자금 여력도 충분하다.
과거에도 우리나라는 IT(정보 기술) 분야에서 정부와 대기업이 협력해 D램 반도체 개발과 이동통신 CDMA(코드분할 다중접속)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경험이 있다. 서동철 중앙대 약대 교수는 “새로운 전염병이 계속 출현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백신 산업은 우리나라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