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 기기에서 전력을 공급하는 전지는 필수 부품이다. 최근 웨어러블(착용형) 전자 기기가 발달하면서 과학자들이 유연한 전지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웨어러블 전자 기기를 몸에 편하게 착용하려면 전지도 잘 휘어져야 하고 폭발 위험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연구진이 전극과 전해질을 바꾸는 방식으로 잘 휘면서도 성능이 좋은 전지를 내놓았다.

◇1만 번 접었다 펴는 태양전지

전지가 잘 휘어지려면 우선 딱딱한 전극을 유연한 소재로 바꾸어야 한다. 카이스트(KAIST) 화학과 변혜령·김우연 교수팀은 “무기물 기반의 전극을 대체할 수 있는 유연하고 가벼운 유기 전극을 개발했다”라고 국제 학술지 ‘어드밴스드 에너지 머티리얼스’에 지난 6일 밝혔다.

유기물은 가볍고 휘어질 수 있지만 전류가 잘 흐르지 않아 전극 소재로 잘 쓰이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구멍이 많이 뚫린 골격 구조체를 만들었다. 골격 구조는 유기 분자들 간의 안정성을 강화하고 전기를 띠는 입자(이온)의 이동을 원활하게 한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새로운 구조의 유기 전극 덕분에 전지는 6분에 한 번씩 하는 충·방전을 1000회 할 수 있었다. 변혜령 교수는 “유기물로 만든 골격 구조체로 가볍고 휘어지는 전극의 실용화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차세대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도 전극 소재를 바꿔 유연성을 높였다. 부산대 전일 교수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 이필립 박사 연구팀은 접을 수 있는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를 개발해 국제 학술지 ‘어드밴스트 사이언스’에 지난 2월 발표했다.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의 소재는 유기물과 무기물이 섞여 있는 금속 산화물이다. 휴대용 전자 기기의 전원으로 활용하려면 하부 투명 전극의 유연성을 높여야 했다. 연구진은 투명 전극으로 많이 쓰이는 인듐주석산화물(ITO)을 대신해 탄소나노튜브와 고분자인 폴리이미드를 활용했다.

ITO는 접으면 깨진다. 반면 탄소나노튜브는 유연성과 투명성을 동시에 가지지만, 표면이 거칠다는 단점이 있다. 이로 인해 여러 층을 쌓기 어려웠다. 연구진은 탄소나노튜브의 거친 표면을 폴리이미드로 메워 매끄럽게 만들었다. 덕분에 여러 층을 결합할 수 있었다.

접을 수 있는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는 탄소나노튜브를 쓴 유연 태양전지 중 최고 수준의 광전변환효율(15.2%)을 나타냈다. 또한 500회 충·방전하거나 1만회를 반복해서 접어도 성능이 처음과 동일하게 유지됐다. 전일 교수는 “탄소나노튜브를 폴더블·롤러블 디바이스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체 전해질로 전지 변형 가능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김해진 박사팀은 전지의 전해질을 바꾸는 방식으로 휘어지는 전지를 개발했다. 연구진은 “액체 전해질을 고체로 대체한 전(全)고체 전지를 개발해 변형에도 정상적으로 작동함을 확인했다”고 지난 1월 밝혔다. 한국화학연구원과 성균관대, 전남대, 인하대 연구진이 연구에 참여했다.

기존 리튬 이온 액체 전해질은 고체 용기에 들어있어 전지를 마음대로 변형할 수 없었다. 반면 고체 전해질은 고분자 성분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변형이 가능하다. 연구진은 1㎜ 이하 두께로 전지를 얇게 제작했다. 전지는 구기거나 자르는 등 극한의 변형에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또 1000회 접었다 펴도 성능을 유지했다.

고체 전해질 전지는 자유롭게 모양을 변형할 수 있어 다양한 기기에 적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연구진은 “넓은 면적의 전극들을 쌓았는데도 전지의 자유 변형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기존의 기술에서 진일보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이 개발한 전지는 안전성도 향상됐다. 액체 전해질이 새면 폭발할 수도 있지만 고체 전해질은 그런 문제가 없다. 실험에서 전지를 절단하거나 외부 파우치를 열어 내부를 공기 중에 노출시켜도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김해진 박사는 “웨어러블 기기와 드론, 전기자동차에 활용되는 전지 모두에 적용 가능해 미래 산업의 판도를 바꿀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