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 구글은 9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서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사람이 수개월 걸려 하던 반도체 칩 설계 작업을 단 6시간에 끝냈다”고 밝혔다. 특히 구글은 이번에 차세대 AI 칩인 TPU(텐서프로세싱유닛) 버전 4의 설계 작업 일부를 AI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밝혔다. AI가 자신에게 필요한 반도체를 직접 설계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로, 영화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에서처럼 기계가 기계를 만들던 장면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번에 AI가 설계에 성공한 TPU는 AI의 데이터 분석과 딥러닝(심층 신경망 학습)에 쓰이는 반도체 칩이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대표는 지난달 18일 온라인으로 열린 연례 개발자 행사 ‘구글I/O 2021’에서 전작인 TPU 버전 3보다 2배 이상 빠른 TPU 버전 4를 공개했다. AI를 이용한 설계 기술이 보급되면 전 세계적인 반도체 부족 사태를 해결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칩 용도에 맞게 소자 배치 최적화
반도체 칩 개발에서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드는 단계가 이른바 ‘평면 배치(floorplanning)’ 과정이다. 건물의 내부 공간을 용도에 맞게 배치하듯, 손톱만 한 크기의 칩 안에 논리 회로(게이트) 수천만 개와 기억 소자(메모리 블록) 수천 개를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과정이다. 이 소자들을 연결하는 배선 길이도 수㎞나 된다.
소자 간격이 짧으면 그만큼 배선이 짧고 신호도 빨리 전달되지만, 소자들이 너무 밀집하면 전력 소모가 많아지는 문제가 생긴다. 반도체 칩 설계자들은 칩의 용도에 맞춰 소자 배치를 최적화해야 한다. 예컨대, 스마트폰용 칩은 배터리 수명을 늘리기 위해 전력 소모를 최소화해야 하고, 데이터센터용 칩은 속도가 최우선 목표다. 현재는 여러 설계팀이 칩의 각 부분을 나눠 맡아 동시에 최적화 작업을 진행해도 수개월씩 걸린다.
안나 골디 연구원이 이끄는 구글 개발진은 먼저 AI에 기존 평면 배치 설계도 1만 종을 학습시켰다. 이후 가상의 칩에 소자 수백만 개를 배치하도록 했다. 동시에 다른 AI로 칩의 용도에 가장 적합한 평면 배치를 선별했다. 메모리 소자를 배열하는 경우의 수는 10의 2500제곱이다. 바둑돌을 놓는 경우의 수가 10의 360제곱인 데 비하면 상상할 수 없는 수다. 배치도를 일일이 평가해 최적의 배치를 찾는 것은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연구진은 이른바 강화학습법을 이용해 AI가 스스로 최적 배치법을 익히도록 유도했다. 강화학습은 강아지에게 특정 행동을 계속 설명하기보다 그 행동을 했을 때 칭찬이나 먹이 같은 보상을 주는 훈련 방식이다. TV 예능 프로에서 반려견의 행동을 교정할 때 널리 쓰이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구글 연구진은 AI가 우연히 제시한 배치가 그전보다 나으면 좋은 평가를 해 계속 같은 쪽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했다.
◇“마법과 같은 기술 발전” 평가
UC샌디에이고의 앤드루 캉 교수는 네이처에 같이 발표한 논평 논문에서 “세계적인 과학 작가 아서 클라크는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며 “구글 연구진의 성과도 마법과 같다”고 평가했다. 캉 교수는 “반도체 칩 설계 자동화가 더 빠르고 뛰어나며 저렴한 칩을 구현해 반도체의 집적도가 18개월마다 2배씩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어의 법칙은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의 이름에서 따왔다.
구글 연구진은 AI의 신경망 설계 기법은 시간이 많이 드는 다른 칩 설계 단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2~3년씩 걸리는 전체 반도체 칩 개발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고 기대했다. 자율주행차, 5G(5세대 이동통신)와 AI 등 반도체 칩이 핵심인 첨단 기술의 발전 속도가 더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