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으로만 알려졌던 대마(大麻)가 질병 치료제로 주목받고 있다. 영국에서 개발된 대마 성분의 소아 뇌전증(간질) 치료제인 에피디올렉스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지난 4월 이 약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대마의 약용 물질을 활용하기 위한 연구가 본격화된다. 버려지던 대마에서 약용 물질을 뽑아내고 장기적으로 약용 성분이 많은 대마 신품종을 개발하는 연구이다. 장준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강릉분원장은 지난 11일 강릉분원 천연물연구소에서 열린 한국과학기자협회 기자간담회에서 “창립 30주년을 맞는 2033년까지 글로벌 천연물 신약을 개발하겠다”며 “대마는 강릉분원 천연물연구소의 스마트팜 기술을 적용하기에 최적인 작물”이라고 밝혔다.
◇악마는 누르고 천사 성분만 활용
일반적으로 ‘마약’이라 부르는 대마는 잎과 암꽃을 건조한 마리화나이다. 치료제나 화장품 등에 쓰이는 대마는 산업용 헴프(Hemp)이다. 대마에는 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THC)이라는 환각 성분이 있지만 소아 뇌전증 치료제의 원료인 칸나비디올(CBD)도 들어 있다. 마리화나의 THC 함유량은 6~20%, 헴프는 0.3% 미만이다.
국산 대마 품종은 섬유용 청삼으로 CBD의 함량이 낮아 의료용으로는 적합지 않다. KIST 강릉분원 천연물연구소는 이달부터 강원대, 농심, 휴온스 등과 THC는 낮고 CBD 성분이 많은 대마 신품종을 개발하고, CBD를 경제적으로 추출하는 연구를 시작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부터 4년 반 동안 130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대마의 CBD 성분은 소아 뇌전증뿐 아니라 알츠하이머 치매, 파킨슨병, 다발성 경화증, 우울증 등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지금까지 CBD로 만든 치료제가 5종 개발됐다. 올 초 미국 미시간 주립대 연구진은 대마의 CBD 성분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의 폐 손상도 막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제약사 GB사이언스와 코로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대마 의약품의 시장 전망은 밝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인 그랜드뷰리서치에 따르면 대마의 CBD 관련 시장은 2028년 약 134억달러(약 15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12월 국제연합(UN) 마약위원회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권고에 따라 대마를 마약류에서 제외했다.
◇컨테이너형 대마 스마트팜 개발
KIST 연구진은 대마용 스마트팜도 개발하고 있다. 스마트팜은 각종 센서로 식물의 생장 상태를 실시간 파악하면서 최적의 재배 조건을 제공하는 시설이다. KIST 연구진은 대마 생산에서 약용 물질 생산까지 한곳에서 할 수 있는 컨테이너형 스마트팜을 개발하고 있다. 김형석 스마트팜융합연구센터장은 “컨테이너형 대마 스마트팜은 전량 헴프 활용도가 높은 미국 시장에 수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KIST 연구진은 이미 상처 치유 성분인 마데카식산을 함유한 병풀 같은 약용 식물에 스마트팜 기술을 적용해 기술력을 입증했다. 국내 제약사는 약품 생산을 위해 마데카식산 함량이 월등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산 병풀을 수입한다. KIST 연구진은 국내 자생 병풀도 마데카식산을 많이 생산할 수 있도록 최적의 생장 조건을 개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형 냉장고 형태의 스마트팜인 푸드 주크박스도 개발했다. 동전을 넣으면 노래가 나오는 주크박스처럼, 소비자 기호에 맞게 작물을 재배하는 맞춤형 스마트팜이다.
국산 대마의 산업화 연구도 진행 중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올해부터 4년간 대마 CBD 원료의약품 수출과 소아 뇌전증 치료제 국산화 연구에 390억원을 지원한다. KIST와 한국콜마, 유한건강생활 등 20개 기관이 참여한다.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대마 줄기로 삼베를 만들고 잎은 전량 소각했다. 김태정 KIST 천연물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대마 잎에 THC 성분이 있어 폐기하지만 그 속에는 CBD가 더 많이 있다”며 “대마 잎에서 THC를 제거하는 기술과 CBD로 가공하는 기술을 통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천연물연구소는 최근 3년간 대마에서 CBD와 THC 성분을 분리, 가공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특허를 7건 출원했다. KIST의 대마 가공 기술을 바탕으로 기술 출자 회사인 ㈜네오켄바이오도 창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