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는 사람이 탄 잠수정이 미생물 크기로 축소돼 혈관을 막은 피떡을 제거하는 장면이 나왔다. 영화의 상상력이 이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자석의 힘으로 움직이는 초소형 로봇이 장에 이식한 펌프에 우주선처럼 도킹(결합)해 인슐린을 전달하고, 약물이 잘 닿지 못하던 중추신경계까지 누비고 있다. 로봇을 이용하면 주사가 필요 없어 환자의 불편을 해소할 뿐 아니라 환부에만 약을 투여해 약물 부작용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인슐린 전달 위해 도킹하는 로봇
이탈리아 산타나 고등과학원(SSAS)의 아리아나 멘치아시 교수는 지난 18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로보틱스’에 “당뇨병 돼지 몸속에서 로봇 캡슐이 장 속에 이식한 펌프에 인슐린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제1형 당뇨병 환자는 인슐린 분비 세포가 없어 혈당을 조절하지 못한다. 어린이 환자가 많아 소아 당뇨병이라 불린다. 환자는 하루에 몇 번씩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한다.
매일 인슐린 주사를 맞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지금도 당뇨병 환자에게 인슐린 펌프를 이식한다. 혈당이 낮아지면 자동으로 인슐린을 공급하는 장치다. 하지만 인슐린 자체는 몸을 뚫은 관으로 전달해야 한다. 이탈리아 연구진은 이를 로봇 캡슐로 대체했다.
로봇 캡슐은 장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한다. 소장 벽에 이식한 폴더블 폰 크기의 인슐린 펌프는 자석의 힘으로 캡슐을 끌어당겨 정확한 위치가 되도록 회전한 다음 도킹시킨다. 이후 바늘로 캡슐을 찔러 인슐린을 뽑아낸다. 임무를 마친 캡슐은 장을 통해 배출된다.
멘치아시 교수는 “마치 국제우주정거장에 화물 우주선이 도킹하는 것과 같다”며 “사람에게서도 같은 결과가 나오면 앞으로 주사 대신 캡슐을 삼켜 간단하게 혈당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약물 닿기 어려운 중추신경계도 성공
혈관 속을 누비던 영화 속 잠수정과 흡사한 약물 전달 로봇도 나왔다. 미국 퍼듀대의 데이비드 카펠레리 교수 연구진이 지난 10일 국제 학술지 ‘첨단 로봇공학과 인공지능’에 발표한 마니악(MANiACs) 로봇이 그 주인공이다.
‘자기장에 정렬된 알긴산 캡슐 속 나노 막대’라는 뜻의 영어 약자인 마니악은 이름 그대로 부드러운 캡슐에 자석에 붙는 미세 입자를 넣은 형태다. 책받침 밑의 자석으로 위쪽의 쇳가루를 움직이듯 몸 밖에서 자기장을 걸어 캡슐을 원하는 곳까지 옮길 수 있다. 퍼듀대 연구진은 마니악으로 중추신경계에서는 처음으로 약물 전달 로봇의 효능을 입증했다.
뇌와 척수는 약물을 전달하기 매우 어려운 곳이다. 약물을 많이 투여하면 자칫 정상 조직까지 손상될 수 있다. 연구진은 로봇으로 중추신경계의 환부에만 약물을 전달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쥐의 뇌와 척수의 특정 위치에 염료를 전달해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로봇 캡슐은 45도 각도를 타고 올라가고 혈액 흐름을 거슬러 이동할 수도 있었다.
특히 약물이 적게 투여되면 다시 돌아와 2차 투여도 가능했다. 카펠레리 교수는 “캡슐이 뒤로 돌아가 다시 약물을 투여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한 성과”라며 “아직 초기 연구지만 초소형 로봇으로 신경 질환 환자의 국소 부위에 약물을 원하는 양만큼 전달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말했다.
◇국내에선 치료 목적 따라 변신하기도
국내에서는 환자에 맞춰 변신이 가능한 약물 전달 로봇을 개발했다. 최은표(전남대 교수) 한국마이크로의료로봇연구원 부장연구진은 지난 3월 ‘미국화학회(ACS) 나노’지에 질환 종류에 따라 로봇 형상을 최적화했다고 발표했다. 고형암 환자용 로봇은 피가 빠르게 흐르는 혈관에서 고속으로 약물을 전달하므로 타원형이 적합하고, 끈적끈적한 윤활액이 있는 무릎관절에 투입되는 로봇은 원형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로봇은 모두 키토산 몸체에 자기장을 받는 자성 입자와 약물을 장착한 형태다. 최은표 교수는 “약물 전달 로봇은 세계적으로 아직 초기 단계이고 우리도 충분히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며 “원천 기술에만 머물지 않고 동물실험으로 유효성을 평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