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가루가 세포를 키우고 약물을 전달하거나 골절 부위를 받치는 의료용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싱가포르 난양 공대의 조남준, 송주하 교수와 조선대 장태식 교수 공동 연구진은 지난 25일 국제 학술지 ‘어드밴스드 펑셔널 머티리얼즈’에 “해바라기 꽃가루를 이용해 조직공학, 독성 검사, 약물 전달에 사용할 수 있는 3D(입체) 프린팅 잉크 재료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3D 프린팅은 잉크를 층층이 쌓아 입체 구조를 만드는 방법이다. 난양 공대 연구진은 해바라기 꽃가루와 묵처럼 말랑말랑한 고분자 물질인 하이드로겔을 3D 프린터의 잉크로 삼아 세포를 키울 틀을 12분 만에 만들었다.
틀 표면에는 세포가 달라붙을 수 있도록 콜라겐을 입혔다. 연구진은 “사람 간세포를 뿌렸더니 96~97%의 세포 흡착율을 보였다”며 “기존 세포 배양용 틀과 비슷한 성능이면서 제작 시간은 훨씬 줄었다”고 밝혔다.
◇꽃가루로 바이오잉크의 강도 보강
과학자들은 3D 프린터에 세포나 생체 고분자, 묵 형태의 고분자 물질을 넣고 층층이 뿌려 의료용 입체 조직을 인쇄했다. 하지만 생체 물질은 구조가 불안정하고 부드러워 인쇄 후에 입체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송주하 교수는 “강도를 보강하기 위해 섬유나 다른 입자를 추가하지만 이 경우 노즐이 막히는 문제가 발생했다”며 “꽃가루 잉크는 기계적으로 튼튼하며, 잉크의 유체를 변화시키지 않아 프린터에 지장을 주지 않고 프린팅 후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꽃가루는 수십만, 수백만년이 지나도 내부 세포가 온전할 정도로 튼튼해 ‘식물의 다이아몬드’로 불린다. 연구진은 꽃가루를 잉크로 쓸 수 있도록 6시간 동안 염기성 물질인 수산화칼륨을 처리해 부피를 키우고 말랑말랑한 겔 상태로 바꿨다. 이후 갈조류의 하이드로겔인 알긴산이나 박테리아에서 생성된 물질인 히알루론산과 섞어 꽃가루-하이드로겔 혼합 잉크를 만들었다.
◇약물 전달, 부목 소재로도 활용 가능
조남준 교수는 “꽃가루 겔 입자는 속이 빈 껍질 구조를 갖고 있어 약물이나 세포, 생체분자를 운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꽃가루 안에 약물을 넣고 환부에서 산성도를 조절하면 약물을 방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꽃가루는 염기성 물질을 만나면 부풀었다가 산성도를 높이면 다시 부피가 줄어들면서 단단해진다.
연구진은 꽃가루 잉크에 형광 염료를 섞어 세포 배양 틀을 인쇄했다. 이후 산성도를 조절하자 염료를 빠른 속도로 방출하는 것을 확인했다. 조 교수는 “꽃가루가 염기 조건에서 부풀면서 약물을 흡수했다가 산을 처리하면 수축하면서 약물을 방출한다”고 설명했다.
꽃가루 잉크는 몸 형태에 꼭 맞는 소재를 만드는 틀이 될 수도 있다. 연구진은 3D 프린터로 꽃가루 겔 위에서 팔꿈치를 받칠 실리콘 반깁스 그물망을 인쇄했다.
◇재료비 낮아 상용화 가능성 높아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의 제프리 글렌 교수는 “이번 논문은 환경 친화적이고 저렴하며 독성이 없는 재료로 약물 전달체를 3D 프린팅할 수 있을 보여준 결과”라고 평가했다. 난양 공대 조남준 교수는 “꽃가루 잉크를 만드는 과정이 간단하고 저렴할 뿐 아니라 크기와 모양, 특성이 다양환 꽃가루도 쉽게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식물은 생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인해전술을 쓰기 때문에 꽃가루의 양이 넘쳐난다. 옥수수 하나의 알갱이가 수백 개에 불과하지만 이를 위해 꽃가루를 500만 개까지 방출한다. 플라스틱을 만드는 폴리락틴산(PLA) 원료가 1㎏에 3달러이지만 꽃가루는 0.01달러에 불과하다. 가공 방법만 발전하면 세상에 이렇게 싼 다이아몬드가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