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아메리칸대의 졸업식 모습. 탈레반이 재집권하면서 지난 20년간 양성된 여성 과학자들이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다./카불 미 대사관

탈레반 치하에서 아프가니스탄의 과학 연구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외국과 공동 연구를 한 과학자들이 목숨마저 위태로워지자 국제 과학계가 이들의 탈출을 지원하고 나섰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지난 27일(현지 시각)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20년 만에 아프간을 재장악하자 과학자들이 그동안 힘들게 구축된 과학 연구 기반이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고 전했다. 앞서 사이언스지는 지난 20일 ‘죽고 싶지 않아요’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탈레반 집권으로 아프간 과학자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밝혔다.

◇20년 간 구축된 과학 기반 무너질 위기

탈레반은 1996~2001년 아프간 집권 시절 근본주의 이슬람 율법으로 여성의 교육 기회와 국제 협력연구를 금지했다. 탈레반이 붕괴하자 아프간은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과학 연구 기반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지난 20년간 아프간은 국제 사회의 도움으로 여성 교육을 정상화하고 수십 개의 공립, 사립대학을 설립했다. 세계은행과 미국 정부가 지원한 아프가니스탄 아메리칸대가 대표적인 예이다. 공립대학의 학생 수는 2001년 8000명에서 2018년 17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 중 4분의 1은 여학생이 차지했다.

아프간의 과학 역량도 성장했다. 아프간에서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도 절대적인 수는 적었지만 성장 속도는 빨랐다. 2011년 71편에서 2019년 285편으로 늘었다. 아프간 과학을 재건하기 위해 해외로 유학한 학자들도 속속 귀국했다, 독일에서 온 한 아프간 과학자는 지진연구를 위해 전국에 지진 관측망을 구축했다.

탈레반이 재집권하자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과학자들은 연구비가 끊기고 연구자들이 해외로 도피하면 과학 연구가 중단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실제로 아프간 재집권 후 수십억 달러의 해외 아프간 자산이 동결되면서 대학과 연구에 대한 지원이 끊겼다. 카불의 아프간 과학아카데미는 연구자 200명과 직원 160명이 있는데 탈레반 공격이 심해진 지난 두 달간 급여를 주지 못했다.

여성 과학자들은 과거 탈레반 치하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몽골계 소수민족인 하자라족 출신으로 아메리칸대를 졸업한 한 여교수는 네이처에 “카불 서쪽의 바미얀시에서는 탈레반이 여성들에게 직장에 나오지 말고 집에 머무르라고 지시했다”며 “현재 탈레반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2010년 아프간 수도 카불에 설립된 사립 아빈세나대를 졸업한 한 여성 엔지니어는 사이언스에 “그동안 여성들이 아프간 사회에서 성취한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7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로봇 경진대회에 참가한 아프간 여학생팀. 최근 아프간 탈출에 성공했다./위키미디어

◇탈레반 테러 공격의 타깃이 된 과학자들

과학자들은 그동안 탈레반의 테러에 시달렸다. 사이언지는 키버 마셜이라는 가명을 쓴 아프간 과학자가 지금까지 탈레반으로부터 2009년과 2019년 폭탄 테러를 당했다고 전했다. 미국 국제개발국과 함께 아프간 남동부에서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공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탈레반은 반과학주의자들”이라며 “교육받은 사람들이 아프간을 변화시키고 있어 탈레반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과학자는 지난해 아내와 함께 독일로 1년 연수를 떠났는데, 지금은 동료들의 탈출을 돕고 있다.

네이처지는 가장 심각한 피해가 예상되는 곳은 미국 정부의 직접 지원을 받은 아메리칸대라고 밝혔다. 지난 2016년에도 탈레반 공격으로 아메리칸대의 교수, 학생 13명이 사망했다. 탈레반이 카불로 진격하자 이미 60명의 외국인 교직원이 해외로 탈출했지만, 아프간인 교직원은 400여 명 중 20명만 탈출에 성공했다. 2017~2019년 아프간 아메리칸대의 총장을 지낸 케니스 홀랜드 인도 O.P. 진달 글로벌대의 학장은 네이처에 “아메라칸대의 학생 800여명과 졸업생 1000여명도 탈레반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국제 과학계, 아프간 과학자 지원 나서

국제 학계는 탈레반의 보복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아프간 과학자의 해외 탈출을 지원하고 나섰다. 미국 뉴욕에 있는 ‘위험에 빠진 학자를 위한 인도주의 기구(SAR)’는 이달만 아프간으로부터 500여명의 지원자가 나왔다고 밝혔다. 이슬람 율법과 다른 연구를 한 법학자들, 여성 인권운동가, 여학생을 가르친 교육자들과 함께 국제 협력 연구를 한 과학자들도 대거 포함됐다.

사이언스지가 탈레반으로부터 두 차례 폭탄 공격을 받았다고 소개한 아프간 과학자도 SAR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나는 죽고 싶지 않다”며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고 밝혔다. SAR은 전 세계 164개 학술 기관으로부터 아프간 학자들에 대한 지원 협력을 약속받았다.

미국 미시건 주립대는 2017년부터 카불대에서 여성 12명을 포함해 33명의 밀 연구자를 양성하는 대학원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지금은 그동안 양성한 연구자들을 구출하는 프로그램으로 전환했다. 많은 대학, 연구기관은 아프간에 남은 과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터넷 사이트와 소셜미디어에서 과거 아프간과의 협력에 대한 언급을 삭제하고 있다. 아프간 과학자 마셜(가명)은 사이언스에 “목숨을 걸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폐허를 보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