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중 철원, 포천 일대에서 미군 3000여명이 원인 불명의 병에 걸려 피를 쏟고 쓰려졌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76년, 한국인 미생물학자가 들쥐에서 나온 바이러스가 유행성 출혈열의 원인임을 밝혀내고 그 지역을 지나는 한탄강을 따서 ‘한탄바이러스’라고 이름 지었다.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를 족집게 예언해온 글로벌 학술정보 업체인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는 “고려대 명예교수인 이호왕(李鎬汪·93) 박사가 칼 존슨 미국 뉴멕시코대 명예객원교수와 함께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하고 이로 인한 신증후군출혈열(HFRS)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예측 후보로 선정됐다”고 23일 발표했다.
클래리베이트는 지난 2002년부터 생리의학·물리학·화학·경제학 분야에서 연구 논문이 다른 학자의 논문에 2000회 이상 인용된 상위 0.01%의 우수 연구자들을 노벨상 수상 후보로 선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후보로 지목한 연구자 376명 중 59명(16%)이 실제로 노벨상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2014년 카이스트 유룡 교수와 2017년 성균관대 박남규 교수, 2018년 울산과기원 로드니 루오프 교수, 2020년 서울대 현택환 석좌교수가 각각 화학상 후보로 선정된 바 있다.
이호왕 박사는 이번 발표에 대해 “내 연구가 출혈성 질환의 원인 바이러스를 규명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 그리고 많은 연구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것, 나아가 인류 건강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매우 기쁘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함흥의대를 다니다가 월남해 1954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1954~1956년 육군 중위로 복무한 후 정부 지원을 받고 유학해 1959년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미생물학과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69년 미 육군부의 지원을 받아 유행성 출혈열 연구를 시작했다.
이 박사는 “연구를 시작하고 6년 동안 군부대 주변에서 들쥐를 사냥하다가 무장간첩으로 오인돼 경고사격을 받고 동료 연구원이 감염돼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등 위기와 실패가 많았다”며 “후배 연구자들에게 실패를 해도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과학자에게 우연이란 노력을 할 때 찾아오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한탄바이러스는 한국인이 발견한 최초의 병원성 미생물이다. 이 업적은 현재 모든 의학, 생물학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1981년에는 서울 마포구 한 건물 지하상가에서 잡은 집쥐에서 한탄바이러스 친척뻘 되는 서울바이러스도 찾아냈다. 이어 1989년에는 국내 제약사 녹십자의 후원을 받아 한탄바이러스 예방백신인 ‘한타박스’도 개발했다.
코로나 대유행 이후 모두 미국과 유럽의 백신 개발을 부러워하지만, 30여 년 전에는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전염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 백신까지 개발한 것이다. 이 박사는 “바이러스 연구는 지금처럼 남의 연구를 좇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과를 낼 수 없다”며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같은 세계적 연구기관에서 연구비를 따낼 수 있는 수준급 실력과 아무도 생각 못 하는 창의적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대한바이러스학회 초대 회장과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을 지냈다. 올해 클래리베이트가 노벨상 수상 후보로 꼽은 연구자는 모두 16명이다. 9명은 미국, 3명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프랑스, 이탈리아, 한국, 싱가포르 출신이 각각 1명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