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바이오기업 사나텍 시드는 지난달 스트레스를 줄이고 수면을 유도하는 물질이 많이 함유된 기능성 방울토마토를 시판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유전자가 교정된 농작물이 실제로 판매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전자를 자유자재로 잘라내는 가위가 농업에 새로운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병충해에 더 잘 견디고 생산량이 늘어나는 신품종 농작물과 가축이 속속 개발됐다. 특히 지구온난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후변화에 대응할 품종 개발도 활발하다.
◇수면 촉진 토마토, 갈변 않는 버섯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DNA에서 원하는 유전자 부위를 잘라내는 효소 단백질을 말한다. 길잡이 격인 가이드 RNA가 유전자 DNA에서 수리가 필요한 곳을 찾아가 지퍼처럼 결합한다. 캐스9이라는 효소 단백질이 손상된 DNA를 잘라내면, 그 부위가 정상 DNA로 대체된다. 지난해 노벨 화학상이 바로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 가위 개발자들에게 돌아갔다.
일본 쓰쿠바대에서 창업한 사나텍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토마토에서 가바 아미노산을 분해하는 효소를 덜 생산하도록 유전자를 교정했다. 즉 분해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를 잘라낸 것이다. 사나텍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덕분에 토마토의 가바 함유량이 5배나 증가했다고 밝혔다. 가바는 뇌에서 신경세포가 과도하게 작동하는 것을 막아 수면을 촉진하고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인다고 알려졌다.
가바 토마토의 뒤를 이어 다양한 크리스퍼 농작물들이 시장에 선보일 준비를 하고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수확 후에도 갈색으로 변하지 않는 버섯을 개발해 지난 2016년 식품의약국(FDA) 시판 허가를 받았다. 미국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지난 2019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열매가 포도송이처럼 열리는 방울토마토를 개발했다. 크기가 작아 도시 농업에 적합한 품종으로 평가받았다.
쌀과 옥수수, 밀, 콩 등 다양한 농작물에서도 유용물질과 생산량을 늘리는 데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활용됐다. 일본에서는 근육량이 50% 증가하도록 유전자를 교정한 참돔이 시판 허가 심사를 받고 있다.
◇가축 털길이 줄여 온난화에 대응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교배가 가능한 같은 종 안에서 유전자를 수선한다는 점에서 다른 종의 유전자를 삽입하는 유전자 변형 동식물(GMO)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유전자 교정은 수년씩 걸리는 전통적인 육종을 수개월로 단축했을 뿐이란 것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과 일본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식품은 GMO 규제 대상에서 제외했다. 유럽연합은 여전히 같은 GMO로 규제하지만, 유럽연합에서 탈퇴한 영국은 최근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산업통상자원부도 유전자 교정 작물을 GMO와 다르게 규제를 완화하는 법안 개정안을 마련했다.
유전자 교정 연구자들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로 기후변화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유전자 가위로 가축의 털이 덜 자라게 하면 체온이 많이 오르지 않아 기온이 올라간 곳에서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전염병 차단도 가능하다. 영국 에든버러대의 로즐린 연구소는 유전자 가위로 호흡기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돼지를 연구하고 있다. 코로나는 동물에게서 사람으로 전달된 바이러스가 유발했다는 점에서 인간에게도 도움이 될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국내선 근육 25% 늘어난 광어 개발
국내에서도 국립수산과학원이 근육성장을 저해하는 미오스타틴 유전자를 유전자 가위로 제거해 넙치(광어)의 근육량을 25% 증가시켰다. 국립산림과학원은 현사시나무 개량에, 농촌진흥청은 누에 개량에 각각 유전자 가위를 적용했다.
하지만 환경단체들은 산업부의 개정안이 GMO 규제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반대하고 있다. 영국 GMO 반대 단체인 진워치의 헬렌 월러스 박사도 유전자 교정 농작물도 결국 GMO의 길을 갈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가디언지에 “40년 넘게 GM 농작물이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고 약속했지만 현재 재배 중인 GM 농작물의 90%는 생산량 증대를 위해 제초제를 마구 뿌려도 이겨내도록 유전자를 바꾼 것들”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