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미해양대기청(NOAA), 네이처, 스탠퍼드대 그래픽=송수현

1910년부터 1970년까지 남극해에서 수염고래 150만 마리가 포경선에 희생됐다. 고래가 사라지면 먹잇감이던 갑각류 크릴이 늘어날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크릴 개체수도 20세기 중반 이후 80% 이상 급감했다. 왜 고래가 없으면 고래 밥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과학자들이 10년에 걸친 추적 조사를 통해 고래가 해양 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열쇠였음을 밝혀냈다.

◇기존 추산보다 3배나 더 먹어

고래의 비밀을 풀 단서는 밥통 크기에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제러미 골드보젠 교수 연구진은 지난 4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수염고래의 먹이 섭취량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3배나 많았다고 밝혔다.

수염고래는 바다에서 입을 벌려 바닷물을 빨아들인 다음, 입 위에 있는 빳빳한 수염을 필터처럼 사용해 크릴 같은 작은 먹이를 걸러 먹는다. 대왕고래와 참고래, 혹등고래처럼 몸길이가 10~30m에 이르는 대형 고래들이 여기에 속한다.

연구진은 2010~2019년 대서양과 태평양, 남극해에서 수염고래 7종 321마리를 추적 조사했다. 그 결과 수염고래들이 이전 추산보다 3배나 더 먹는 것으로 밝혀졌다. 캘리포니아 연안의 대왕고래와 혹등고래는 식사량이 2~3배 더 많았으며, 남극해의 수염고래들은 크릴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두 배나 더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가장 큰 대왕고래는 하루에 크릴 16톤을 먹어치운다. 열량으로 계산하면 100만~2000만 칼로리로, 빅맥 햄버거 3만 개에 해당한다.

연구진은 20세기 초에는 고래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크릴이 지금보다 5배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과거 고래와 함께 먹잇감인 크릴도 번성했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고래가 먹이사슬을 통해 영양분을 순환시켜 해양 생태계를 번성시켰다고 설명했다. 바로 고래의 똥이 그 역할을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혹등고래가 입을 벌려 바닷물을 빨아들이는 모습. 혹등고래 같은 수염고래류는 기존 추정치보다 3배는 더 많은 먹이를 먹는 것으로 밝혀졌다./미 스탠퍼드대

◇고래 배설물 통해 철분 순환

남극해는 지구에서 가장 생산력이 뛰어난 생태계이다. 먹이사슬 밑바닥에는 식물성 플랑크톤이 있다. 고래의 똥은 바로 이 플랑크톤을 번성시킨 비결이었다. 미국 버몬트대와 하버드대 공동 연구진은 2010년 고래가 영양물질을 바다 깊은 곳에서 표층으로 뽑아 올리는 펌프 역할을 한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고래 펌프’ 이론이다.

고래는 바다 밑바닥에서 크릴을 먹고 수면으로 올라와 배설한다. 이때 크릴에 있던 철분이 배설물 형태로 수면에 퍼진다. 식물성 플랑크톤은 철분을 흡수해 급격히 늘어난다. 크릴과 작은 물고기는 이 플랑크톤을 먹고 자라고, 고래와 더 큰 물고기가 이들을 잡아먹는다.

네이처 논문의 제1저자인 매슈 사보카 박사는 “대형 고래는 움직이는 크릴 가공 공장”이라며 “20세기 전반부에는 보잉 737기 크기의 크릴 가공 공장이 지금보다 100만 군데 더 남극해에 있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그만큼 과거에는 영양분 교환이 원활해서 해양 생태계가 풍부했다는 것이다.

미국 듀크대 연구진이 남극해에서 혹등고래를 연구하고 있다. 하늘에서는 드론이 고래의 크기를 측정했다./미 듀크대

◇어업 생산성 높이고 온난화 방지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고래가 다시 살아나면 해양 생태계의 다양성이 회복되면서 어업 생산성도 올라갈 수 있다고 기대했다. 1900년대 초 수준으로 고래와 크릴이 회복되면 남극해의 생산성이 11%는 올라간다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를 막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고래와 크릴은 살아있는 탄소 저장체이다. 고래와 크릴이 살아나면 연간 2억1500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바다에 저장하는 효과도 예상됐다. 이는 자동차 1억7000만 대가 한 해 내뿜는 양에 해당한다.

고래의 식사량을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이전에는 죽은 고래나 다른 작은 동물을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먹이 양을 추산했다. 연구진은 첨단 기술을 총동원해 바다를 누비는 실제 고래를 조사했다.

먼저 보트를 타고 수면으로 올라온 고래에게 접근해 각종 센서가 들어있는 장비를 등에 붙였다. 여기엔 카메라와 녹음기, 가속도센서, 위성항법장치(GPS)가 들어있어 고래의 사냥 형태를 알 수 있다. 하늘에는 듀크대가 드론을 띄워 카메라로 각각의 고래를 식별하고 몸 크기를 알아냈다. 국립해양대기청(NOAA)과 샌타크루즈 캘리포니아대는 수중 음파 탐지기로 먹잇감의 밀도를 파악했다. 고래만큼 초대형 프로젝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