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공기 중으로 화학물질을 분비해 천적의 침입을 경고하고 짝짓기 상대를 부른다. 바로 공기 중으로 방출되는 호르몬인 페로몬이다.
말 못하는 아기도 몸에서 나는 무색무취의 화학물질로 주변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성별에 따라 반응이 달랐다. 남자는 공격성이 줄어들지만 여성은 더 공격적인 행동을 했다.
◇여성의 뇌에서 공격영역 신경 연결 늘어나
이스라엘 와이즈만과학연구소의 노엄 소벨 교수 연구진은 “아기 머리에서 분비되는 무색무취의 헥사데카날(HEX)이라는 물질이 여성의 공격성을 유발하고 남성은 진정시키는 것을 실험으로 확인했다”고 19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밝혔다.
소벨 교수는 “이 물질이 페로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면서도 “인간의 행동, 특히 공격적인 행동에 일정한 형태로 영향을 주는 분자가 인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은 피부나 침, 배설물을 통해 헥사데카날을 방출한다. 이 물질은 아기의 머리에서 방출되는 분자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소벨 박사는 아무런 냄새가 없는 이 물질을 분리해 실험용 쥐들이 있는 우리로 방출했더니 진정 효과를 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헥사데카날이 사람의 행동에도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진행했다.
먼저21~34세의 남성 67명과 여성 60명을 대상으로 사람들과 인터넷에서 가상의 돈을 상대와 나누는 게임을 하도록 했다. 참가자들은 모두 마사지에 자주 사용하는 클로브 오일 향을 맡도록 했다. 절반은 클로브 오일만 맡았고 나머지는 헥사데카날을 섞은 클로브 오일을 맡았다. 헥사데카날은 클로브 오일 향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참가자들이 마주한 게임 상대는 사실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였다. 컴퓨터는 전체 돈의 90% 미만을 제시하면 무조건 반대해 화를 돋웠다. 게임 상대가 반대하면 참가자는 어떤 돈도 받을 수 없다.
화가 난 참가자는 버튼을 눌러 상대에게 아주 높은 소리를 발사할 수 있었다. 헥사데카날이 섞인 향을 맡은 여성은 다른 사람보다 17.6% 더 강한 소리를 상대에게 발사했다. 반면 헥사데카날 향을 맡은 남성은 일반 클로브 오일 향만 맡은 사람보다 18.5% 약한 소리를 선택했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의 뇌 상태를 자기공명영상(MRI) 장치로 촬영했다. 헥사데카날 향을 맡으면 남녀 모두 뇌에서 사회적 신호를 인지하는 영역에서 활동이 증가했다. 하지만 게임을 하면서 화가 난 여성은 공격적 행동과 관련된 뇌 영역에서 신경 연결 활동이 증가했으며, 남성은 해당 신경 연결이 줄어들었다.
◇어린 개체 생존 위해 수컷의 공격성 약화시켜
논문 제1저자인 와이즈만 연구소의 에바 미쇼르 박사는 “과학자들이 아직 어떤 조건에서 사람이나 동물이 헥사데카날을 분비하는지 밝히지 못했지만, 인간이 체취를 이용해 서로 무의식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이번 결과는 아기의 생존 전략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했다. 미쇼르 박사는 포유동물에서 새끼를 가진 암컷은 아기를 지키기 위해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지만, 반대로 수컷은 자기 새끼를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어린 동물은 페로몬을 분비해 암컷의 공격성을 높여 자신을 지키게 하고 수컷의 공격성은 누그러뜨려 자신을 해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트리스트램 와이트 교수는 사이언스에 “연구진은 아기든 어른이든 사람의 행동을 바꿀 정도로 헥사데카날을 분비하는지 보여주지 못했다”며 “게다가 이번 연구와 같은 심리실험은 재연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고 한계를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