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치맥’이란 단어가 올라갔다. 맥주 하면 치킨이라는 말이 한국 문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피자를 내세운 ‘피맥’이 나오더니 요즘에는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는 ‘책맥’ 또는 ‘북맥’이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해외여행을 못 나간 사람들이 책과 작가의 나라에서 나온 맥주를 즐기며 아쉬움을 달래는 것이다.
작가의 문학 성향만큼 맥주 맛도 달라 책맥은 골라 읽고 마시는 재미가 있다. 릴케의 책을 읽는다면 체코의 맥주 필스너가 제격이고, 하루키라면 그가 광고 카피까지 쓴 삿포로 맥주를 마셔야 한다. 그런데 코로나로 사람들의 발이 묶인 사이 맥주가 온난화에 발목이 잡혔다. 맥주 원료인 홉과 보리 재배가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홉은 유럽과 아시아 온대 지방에서 자라는 삼과(科)의 덩굴식물이다. 솔방울 모양의 황록색 꽃이 맥주에 쓰인다. 1516년 독일 바이에른 공국에서 맥주는 물과 보리, 홉으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맥주 순수령을 반포했다. 효모균은 보리의 당분을 발효시켜 알코올을 만들고 홉은 맥주 특유의 쓴맛과 향을 낸다.
홉 재배에 적합한 지역은 북위 35~55도다. 여기에 속한 태평양 북서부의 미국 워싱턴과 오리건, 아이다호주가 전 세계 홉 생산량의 40%를 차지한다. 맥주 하면 떠오르는 독일과 체코, 영국도 홉을 키우기 적합한 위치에 있다. 이 지역들은 최근 온난화가 불러온 극심한 가뭄으로 농사에 큰 타격을 입었다.
홉 특유의 향에는 항생물질도 들어있는데 이 역시 기후변화로 감소할 수 있다. 홉은 혹독한 겨울을 나야 항생물질을 만들고 병충해에 강해지는데 온난화로 겨울밤 기온이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홉은 2020년 발생한 엄청난 산불로 연기를 쐬면서 향이 손상됐다. 다행히 코로나로 맥주 수요가 줄면서 아직 홉 재고량이 남아 있지만, 기후변화가 지속되면 더는 감당하지 못할 수 있다.
영국은 기후변화에 맞서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은 겨울과 혹독한 여름을 견딜 신품종 홉을 개발하고 있다. 3000~4000여 변이종 중에서 기후변화를 극복할 신품종을 찾고 있다. 미국은 온난화가 불러온 곰팡이 병을 피해 홉 재배지를 미국 알래스카와 캐나다처럼 더 높은 위도로 옮기고 있다. 플로리다주는 홉의 개화기인 여름에 일조량이 적어 재배지로 맞지 않았지만 최근 지지대에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달아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플로리다산 홉은 멜론 향이 나는 맥주를 탄생시켰다.
첨단 생명공학 기술도 동원됐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연구진은 아예 홉 없이 맥주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홉 특유의 향을 내는 리나로올과 게라니올은 민트와 바질에서도 만들어진다. 연구진은 DNA 절단 효소인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가위로 효모 유전자 일부를 잘라내고, 홉 향기 물질을 만드는 식물성 유전자로 대체시켰다.
맥주 전문가들인 양조장 직원 27명에게 눈을 가리고 맛을 보게 했더니 새 효모로 만든 맥주가 기존 맥주보다 더 홉 향이 강하다고 답했다. 홉 겸용 효모로 맥주를 만들면 물을 절약하는 효과도 있다. 생맥주 500㎖ 한 잔에 들어가는 홉을 키우려면 물 50ℓ가 필요하다. 배보다 배꼽이 100배는 큰 셈이다.
보리도 유전자가위 혜택을 받았다. 일본 오카야마대 연구진은 지난해 11월 온난화로 보리가 수확기 전에 싹이 트는 것을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가위로 해결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유전자가위로 보리의 유전자 두 가지를 정확하게 교정해 동면(冬眠) 기간을 늘리는 데 성공했다.
전 세계 보리 생산량 중 17%가 맥주 생산에 쓰인다. 기후변화는 보리 생산량을 17%까지 감소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대 연구진은 2018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 식물학’에 “기후변화가 지금처럼 지속되면 보리 농사가 타격을 입어 맥주 가격이 뛰고 수요가 급락할 것”이라고 밝혔다.
온실가스 방출이 지금처럼 계속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라면 맥주 가격이 폴란드에서 5배로 가장 많이 상승하고, 이어 아일랜드, 벨기에, 체코가 2배 뛴다고 예측됐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와 벨기에, 체코의 맥주 소비는 3분의 1 감소하고 영국은 4분의 1 줄어들 것으로 예측됐다. 이대로라면 코로나가 끝나도 해외로 나가 괴테의 흑맥주와 셰익스피어의 에일을 맛보기 힘들어질 수 있다. 생존만큼 중요한 인류의 정신문화를 지키기 위해 과학과 문학의 동맹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