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壬寅年) 호랑이해를 맞아 곳곳에 호랑이 사진이 보인다. 주황색 또는 황금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는 어디서나 눈에 확 들어온다. 호랑이는 어떻게 그토록 눈에 잘 띄는 털을 갖고도 사슴이 눈치 채지 못하게 접근할 수 있을까.
과학자들이 동물의 털 색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고 있다. 사슴의 눈에 호랑이의 주황색 털옷은 나뭇잎과 다를 바 없는 녹색으로 보인다. 진짜 녹색 털을 가진 나무늘보도 사실 몸에 함께 살고 있는 공생 미생물에게 위장색을 제공받는다. 생존을 위해 본색을 숨기는 동물들의 지혜이다.
◇사슴 눈에 호랑이는 나무잎일 뿐
영국 브리스톨대의 존 페넬 교수는 지난 2019년 국제 학술지 ‘왕립학회 인터페이스 저널’에 호랑이가 화려한 색의 털옷을 입고도 사슴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눈에 비밀이 있다고 밝혔다.
빛이 눈에 들어오면 망막의 광수용체에서 뇌로 보낼 전기신호로 바뀐다. 망막의 광수용체는 원뿔 모양의 원추세포와 막대 모양의 간상세포로 구성된다. 원추세포는 색을 감지하고 간상세포는 명암을 구별한다.
사람은 적색과 녹색, 청색 빛을 감지하는 원추세포가 있다. 이 빛의 삼원색을 조합해 자연의 모든 색을 감지한다. 침팬지, 고릴라 같은 유인원과 일부 원숭이도 우리처럼 세 가지 색을 감지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육상 동물은 녹색과 청색을 감지하는 원추세포만 갖고 있다. 개와 고양이, 말, 사슴이 모두 그렇다.
결국 사슴은 사람으로 치면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적록색맹인 셈이다. 호랑이가 나뭇잎 사이에 있으면 사람 눈에는 주황색 안전조끼를 입은 사람처럼 선명하게 보이지만, 사슴 눈에는 온통 녹색으로 보여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페넬 교수는 실험에서 사람 역시 적록색맹을 유발하는 안경을 쓰면 사진에서 나뭇잎 사이에 몸을 숨긴 호랑이를 찾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고 밝혔다.
호랑이의 주황색은 갈색멜라닌이라는 색소가 만든다. 지금은 멸종한 발리 호랑이는 아주 짙은 주황색 털을 가져 색맹인 동물들이 밀림에서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에 비해 북쪽으로 가면 호랑이의 털색이 더 옅어진다. 시베리아 호랑이는 황금색에 가까운 색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아예 처음부터 녹색 털을 갖고 있으면 상대가 누구든 쉽게 속일 수 있지 않을까. 페넬 교수는 “동물은 생물 분자 구조가 녹색보다 갈색과 주황색 털을 만들기가 훨씬 쉽다”며 “나무늘보는 유일하게 털이 녹색으로 보이지만 이 마저 털에 사는 녹조류 때문이지 진짜 녹색 털을 가진 동물은 없다”고 밝혔다.
◇나무늘보의 녹색털은 나방 덕분
호랑이의 주황색 털처럼 나무늘보의 녹색 털도 생존을 위한 진화의 결과이다. 나무늘보의 털에는 미세한 틈들이 있다. 이곳에 여러 녹조류가 살면서 털이 녹색으로 보인다. 나무늘보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느린 속도와 녹색으로 보이는 털 덕분에 천적의 눈에 나무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나무늘보의 녹색은 여러 생물이 힘을 합친 결과이다. 나무늘보의 털에는 녹조류 외에도 곰팡이, 심지어 나방도 살고 있다. 미국 위스콘신대의 조너선 파울리 교수는 지난 2014년 국제 학술지 ‘왕립학회보B’에 나무늘보의 몸에서 일어나는 공생관계를 밝혔다.
나무늘보는 일생의 대부분을 나무 위에서 산다. 일주일에 한번만 땅에 내려와 배설을 한다. 똥은 나무에서도 눌 수 있는데 왜 힘들여 땅으로 내려오는 위험을 감수할까. 바로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나방 때문이었다.
나무늘보가 땅에 내려와 배설을 하면 털에 깃들어 사는 나방 암컷이 똥에 알을 낳는다. 나방 애벌레가 자라는 데 최적의 조건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나중에 성충이 된 나방은 다시 나무늘보로 거주지를 옮긴다.
나방이 죽으면 곰팡이에 분해되고 털에 사는 녹조류에게 암모니아와 질산, 인산 같은 영양분을 제공한다. 연구진은 나무늘보에 나방이 많이 살수록 털에 영양분이 더 많고 녹조류도 잘 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녹조류는 나무늘보에게 나뭇잎과 같은 위장색을 주고 동시에 나뭇잎에서 얻기 힘든 지방도 제공한다. 호랑이와 나무늘보의 색에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