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서 고대 로마 시대의 단지가 발굴됐다. 포도주를 담던 병일까, 아니면 곡물을 저장하던 단지였을까. 과학자들이 단지 내부에 남은 물질을 분석해 용도를 확실하게 밝혀냈다. 바로 1500년 전 로마인들이 쓰던 휴대용 변기, 요강이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피어스 미첼 교수 연구진은 “시칠리아 제라체 로마 유적지에서 발굴한 도기 단지는 목욕탕에서 사용한 요강으로 밝혀졌다”고 지난 11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고고과학 리포트 저널’에 발표했다.
◇단지 안쪽 물질에서 기생충 알 확인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의 로저 윌슨 교수는 시칠리아 섬 제라체에서 450~500년 무렵 로마 시대 주택 유적지를 발굴했다. 이 곳에서 부서진 단지 하나가 나왔다. 조각들을 붙여놓고 보니 높이는 31.8㎝이고 윗부분 지름은 34㎝인 원뿔형 단지였다.
윌슨 교수는 “원뿔형 단지는 로마 시대 유적지에서 많이 발굴되며, 대부분 별다른 증거 없이 저장 용기로 불린다”며 “공중 화장실 근처에서도 이런 단지가 많이 발굴된다는 점에서 요강일 가능성도 있지만 증거가 없었다”고 밝혔다.
단지 안쪽에는 석회화된 결석이 붙어 있었다. 케임브리지대 연구진은 결석을 긁어내 분쇄한 다음, 산성 용액에 녹였다. 현미경으로 관찰해보니 기생충인 편충의 알이 보였다. 개나 늑대, 돼지도 편충을 갖고 있지만 단지에서 나온 것은 사람에 기생하는 종류였다. 단지가 사람 배설물을 담던 요강이었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요강을 자주 쓰면서 오줌과 대변에 있는 광물이 단지 안쪽에 쌓여 단단한 돌처럼 굳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대변에 섞여 있던 편충의 알이 돌 속에 갇혀 오랜 시간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 시대 도기에서 결석에 포함된 편충 알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편충은 길이가 5㎝ 정도로 사람의 장벽에 기생한다.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8억명이 감염된다. 편충이 낳은 알은 대변에 섞여 배설된다. 나중에 사람이 편충에 오염된 흙이나 음식과 접촉하면 다시 감염된다. 감염 증상은 보통 설사 정도로 약하지만, 심한 경우 발육이 방해되고 인지기능에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
◇고대인의 건강 상태 보여줄 단서
미첼 교수는 “단지가 로마 주택 유적지의 목욕탕 구역에서 나왔는데 이 곳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며 “목욕을 하러 온 사람이 화장실에 갈 필요가 있을 때마다 단지를 요강으로 썼을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진은 단지 모양이나 크기가 사람이 앉기에 적당하지만 아마도 단지 위에 가는 식물 줄기로 만든 고리버들 의자나 나무 의자를 놓고 볼 일을 봤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요강은 다양한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2700년 전 유적지에서 요강이 발굴됐으며, 기원 전 1300년 이집트 유적지에서 나온 것도 있다. 그리스에서는 기원 전 6세기 요강이 나왔다.
기록에는 로마인들은 준보석인 호마노(縞瑪瑙)나 금으로도 요강을 만들었다고 나오지만 발굴된 요강은 모두 도기나 구리 단지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요강은 1979년 충남 부여군 군수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유물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다.
지금까지 고대 유적지에서 나온 단지는 발굴 위치나 형태로 용도를 알아냈다. 연구진은 박물관에 쌓여 있는 로마 시대 단지를 이번과 같은 방법으로 분석해보면 요강이 더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 네브라스카대의 칼 레인하드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연구진이 사용한 방법은 간단해서 누구나 어디서든 쓸 수 있다”며 “박물관 소장품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요강 단지에서 나온 기생충은 고대인의 위생과 식습관, 건강 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