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 살인범 수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유전자 분석 기법이 아프리카 코끼리 보호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과학자들이 코끼리 상아(象牙)의 DNA를 분석해 밀렵과 밀수 네트워크를 찾아내고 있다.
미국 워싱턴대의 새무엘 와서 교수 연구진은 “사법당국에 압류된 상아의 유전자를 분석해 아프리카 코끼리 밀렵과 상아 밀수의 배후에 있는 국제 범죄 네트워크를 규명했다”고 14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 인간 행동’에 발표했다. 이번 연구에는 미국 국토보안국도 참여했다.
◇상아 DNA로 코끼리 친척 관계 규명
와서 교수 연구진은 앞서 사람 치아에서 DNA를 추출하는 기법을 코끼리에 적용해 당국에 압류된 상아가 어떤 개체에서 나왔는지 구별해냈다. 다른 화물에 섞인 상아가 같은 개체에서 나온 것이라면 두 밀수품은 같은 범죄 조직과 연관됐다고 볼 수 있다.
연구진은 이번에 2002~2019년 아프리카 12국 사법당국이 압류한 상아 111톤 중에 4320개를 골라 유전자를 분석했다. 유전자 분석 대상도 동일 개체에서 친척 관계로 확대했다. 상아의 주인공이 같은 부모를 가졌는지, 아니면 부모 한 쪽이 같은지 분석했다. 그 결과 600개 가까운 수의 상아가 유전적으로 친인척 관계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실제 범죄 수사에 쓰이는 방법이다. 2018년 과거 미국 캘리포니아주 일대를 공포에 떨게 했던 연쇄살인범인 ‘골든 스테이트(Golden State, 캘리포니아주의 별칭) 킬러’가 전직 경찰관 출신인 조지프 제임스 디앤젤로로 밝혀졌다. 당시 경찰은 DNA 족보사이트에서 범인의 친척을 찾아 42년 만에 연쇄살인범을 검거할 수 있었다. 앞서 경찰은 1980년에 발생한 살인 사건 현장에서 범인의 DNA를 확보했지만 당사자의 DNA 정보가 사법 당국에 있지 않아 신원을 알 수 없었다.
유전자 정보는 사법당국이 별개의 수사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워싱턴대 연구진은 상아의 유전자 친척 관계를 이용해 코끼리가 밀렵되는 지역을 확인하고 압류물이 같은 국제 범죄 단체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와서 교수는 “3개 정도의 범죄 단체가 상아 밀수품 대부분과 관련이 있음을 밝혀냈다”며 “또 6개 이하의 범죄 조직이 반복적으로 같은 코끼리 집단을 사냥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미국 국토안보국의 존 브라운 요원은 “DNA 분석 정보가 국제 공조 수사를 위한 로드맵을 제공했다”며 “각국의 사법 당국에 개별 압수물 사이의 연관성을 알려줄 수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상아 밀수 조직이 개별 사건에 대해서만 처벌을 받았지만 여러 국가의 압수품에 연관된 것으로 밝혀지면 더 큰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실제 이번 연구는 최근 워싱턴에서 콩코 출신의 야생동물 밀수범을 처벌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코끼리 밀수, 아프리카 서부로 이동
상아 무역은 1989년 국제적으로 금지됐지만 아시아에서 수요가 많아 아직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해마다 코끼리 5만 마리가 상아 때문에 희생되고 있다.
연구진은 DNA를 통해 2016년까지 상아가 주로 아프리카 남동부의 모잠비크와 위로 탄자니아, 케나에 이르는 지역에 사는 코끼리들에서 나온 것을 확인했다. 2016년 무렵에는 아프리카 남서부의 나미비아, 잠비아, 앙골라에 걸쳐 있는 카방고-잠베이 보호구역에서 밀렵이 증가했다. 이곳은 아프리카에 남은 40만 마리 코끼리 중 23만 마리가 살고 있는 곳이다.
밀렵지역이 동에서 서로 이동하자 밀수도 같이 이동했다. 연구진은 또 17년 동안 상아 밀수가 아프리카 동부의 밀렵 중심지인 탄자니아에서 인근 케냐, 우간다로 이동했음을 밝혀냈다. 내륙 국가인 우간다에서는 상아가 차나 기차를 통해 케냐의 몸바사 항구로 이동했다. 2015년 이후에는 아프리카 중서부의 콩코민주공화국과 앙골라에서 상아 수출이 증가했다. 와서 교수는 “앞으로 콩코민주공화국이 상아 수출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