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臟器)의 혈액형을 모든 사람이 이식받을 수 있는 O형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됐다. 혈액형이 다르면 장기 이식 과정에서 심각한 면역거부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이식용 장기 부족 문제를 해결할 길을 열 것으로 기대된다.
캐나다 토론토 의대 병원의 마르셀로 시펠 교수 연구진은 16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중개의학’에 “인체에 있는 효소 단백질을 이용해 A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의 허파를 O형으로 바꾸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장내 효소로 항원 제거해 혈액형 바꿔
ABO식 혈액형은 혈액 세포 표면에 있는 당분인 항원의 형태에 따라 구분한다. A형 혈액형은 A항원, B는 B항원을 갖고 있고 O형은 항원이 없다. 반면 항체는 A형이 B항체, B형이 A항체, O형은 A와 B항체를 갖고 있다. AB형은 항체가 없고 대신 A와 B항원을 모두 갖고 있다. 서로 다른 혈액형끼리 장기를 이식하면 항원 항체 반응에 따라 면역거부반응이 발생한다.
연구진은 이식용 장기의 혈액형을 O형 혈액형으로 바꾸면 모든 환자에게 이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O형은 항원이 없어 항원 항체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연구진은 기증받은 A형 혈액형 허파에 몸 밖에서 영양분을 제공했다. 이 허파는 이식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먼저 사람 장에서 당분을 분해하는 효소 두 가지를 허파에 주입했다. 그러자 효소가 적혈구 표면의 A항원을 99% 제거했다. 허파 표면의 A항원은 4시간 안에 97% 제거됐다. 허파의 세포가 혈액형이 A형에서 O형으로 바뀐 것이다.
다음은 허파 이식 수술을 가정해 O형 혈액형을 효소 처리한 허파에 주입했다. 즉 O형 혈액형을 가진 환자에게 허파를 이식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O형 혈액형은 A항체가 있어 이전 같으면 A형 허파와 만나 항원 항체 반응을 유발했어야 한다. 하지만 실험 결과 효소 처리를 한 허파는 다른 허파보다 항체로 인한 손상이 미미했다.
시펠 교수는 “허파에 혈액을 주입하자 거부반응이나 장기 기능 손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효소로 장기 표면의 항원을 없애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생긴다. 시펠 교수는 초기 급성 면역거부반응이 일어나는 수일에서 수주만 장기에서 항원을 없애면 충분하다고 밝혔다.
◇만성적 이식용 장기 부족 문제 해결
장기의 혈액형을 모두 O형으로 바꾸는 일이 임상에 적용되면 만성적인 이식용 장기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 테면 O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은 누구에게나 장기를 줄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은 O형 장기만 받을 수 있다. 시펠 교수 연구진의 아이주 왕 박사는 “O형 환자는 A형보다 허파 이식 대기 기간이 두 배나 된다”며 “이로 인해 O형 환자는 허파 이식 수술을 기다리다가 사망할 위험이 20%나 높다”고 말했다.
다른 장기도 마찬가지다. 신장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 중 혈액형이 O형이거나 B형인 사람은 수술을 받기까지 평균 4~5년을 기다린다. A형이나 AB형인 사람은 2~3년이다.
이번 실험은 인체 외부에서 장기에게만 이뤄진 것이라 실제 이식 수술에 적용할 수 있는지 판단하기에 이르다. 영국 로열 팹워스병원의 자시비르 파르마 박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번 연구는 장기 이식의 효과를 단기간만 관찰해 장기 표면의 항원을 바꾼 것이 나중에 부정적 효과를 낼지 판단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신중한 의견을 보였다.
연구진은 우선 동물실험에서 혈액형을 바꾼 장기가 장기간 면역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을지 알아보겠다고 밝혔다. 시펠 교수는 “임상시험에서 안전성을 보이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며 “하지만 임상에서도 이번과 같은 결과가 나오면 정말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