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이 연구비 삭감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러시아와 전쟁이 벌어지면 우크라이나 과학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RFE/RL

전쟁이 또 다시 과학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무장 세력인 탈레반이 재집권하면서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이룩한 아프가니스탄의 과학 기반이 무너진 것처럼, 러시아 침공이 임박하면서 유럽과 협력해온 우크라이나 과학자들도 연구실을 떠날 위기에 처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지난 19일(현지 시각) “러시아 위협에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이 2014년 혁명 이후 이룩한 발전이 훼손될까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8년간 구축한 유럽 협력관계 무너지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갈등은 8년 전 시민혁명에서 시작됐다.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연합(EU)과의 경제통합 논의 절차를 중단하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해 친러파 대통령을 축출했다. 우크라이나 과학도 2014년 혁명 이후 러시아와 관계를 단절하고 EU와 협력을 강화했다.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은 2015년부터 EU의 연구비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와 인근 벨라루스에 13만 명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전쟁 위험이 고조되자 과학자들은 그동안 과학에서 이룩한 성과가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수학연구소의 이리나 에고르첸코 박사는 네이처에 “지금은 따뜻한 곳에서 인터넷이 가능한 곳에 앉아 있지만 내일은 어찌될지 모른다”며 “모든 과학자들이 휴대폰과 충전기를 준비하고 수시로 가족과 통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스스로 자기 방어 수단을 마련하거나 대피할 준비를 하고 있다. 러시아 국경에서 30㎞ 떨어진 곳에 있는 수미 국립 농업대는 교직원들에게 적대 행위에 대비한 훈련을 시켰다. 폭격이 시작되면 방공호로 피하고 과학장비와 생물 시료를 옮기는 계획도 마련했다. 과학자들은 개별적으로 피난 가방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과학자들은 8년 전에도 같은 위기를 겪었다. 2014년 친러파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서 축출되자 러시아가 침공해 남부 크림 반도를 병합했다. 그곳에 있던 과학 연구기관들은 러시아 관할로 넘어갔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루한시크와 도네츠크에서 정부군과 친러 반군 간의 전투가 계속되자 이 지역 18개 대학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많은 연구자들이 이 과정에서 집과 실험실을 잃었다.

당시 다른 곳으로 이전한 국립 도네츠크대의 일리아 카드즈히노프 연구부총장은 “기존의 관계를 잃고 새로 구축하는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은 러시아 대신 유럽, 미국, 중국과 새로운 협력 관계를 맺었다. 러시아 침공이 임박했다는 위기감이 높아지자 우크라이나 과학계에는 새로 구축한 과학 연구 협력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퍼졌다.

연구를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과학자. 러시아 침공이 임박하면서 유럽과 협력해온 우크라이나 과학자들도 연구실을 떠날 위기에 처했다./우크라이나 리비우 국립공대

◇전쟁 위기에 몰린 과학, 아프간과 닮은 꼴

폴란드 국경지대에 잇는 리비우 국립 공대의 올렉산드르 베레즈코 교수는 3월 말 젊은 연구자 20명과 과학 연구 데이터를 자유롭게 공유하는 오픈 사이언스를 논의할 회의를 갖기로 했지만 취소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그는 “우크라이나 과학 연구 시스템을 유럽과 세계 기준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하지만 전쟁이 발생하면 정부는 군대와 국민 생존을 최우선 과제로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의 식물생리연구소에 있는 블라디미르 쿠즈네초프 박사는 네이처에 “우리나라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상황은 너무나 바람직하지 않으며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전쟁이 나면)정부는 과학자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고 많은 연구자들이 우크라이나를 떠나는 매우 나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과학의 위기는 아프가니스탄과 많이 닮았다. 2001년 탈레반이 물러난 후 아프간 과학은 서방 세계와 협력을 강화하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고 말했다. 아프간에서는 여성 교육이 정상화되고 수십 개의 공립·사립 대학이 세워졌다. 공립대학의 학생 수는 2001년 8000명에서 2018년 17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 중 4분의 1은 여학생이 차지했다. 아프간에서 국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수도 2011년 71편에서 2019년 285편으로 늘었다.

탈레반 재집권은 이런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 사이언스 보도에 따르면 카불대를 포함해 여러 대학 총장에 탈레반 출신 인사가 취임하면서 교수들이 잇따라 사임했다. 남녀 분리 정책도 다시 시작됐다. 수학과 교수 자리에 이슬람 신학자가 왔다. 서구 과학자들과 진행하던 공동 연구는 중단됐으며, 아프간 과학자들은 대거 해외로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