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유럽 최대의 원자력 발전소인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에 포격을 가해 화재까지 발생하자,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같은 대형 참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원전 구조상 대형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지만, 복잡한 원전 설비에 손상이 생기면 예상치 못한 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원전 지키려… 1㎞ '인간 장벽' 만든 우크라 국민들 - 4일(현지 시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자력 발전소를 공격하자 인근 주민들이 원전으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고‘인간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대형 트럭과 쓰레기 수거차, 타이어, 모래 주머니를 쌓아 차단벽을 만들었다. 뉴욕타임스는 이들이 만든 바리케이드 길이가 1㎞에 달했고 위성 지도에도 포착될 정도였다고 전했다. /트위터

우크라이나의 드미트로 쿨레바 외무장관은 4일(현지 시각) 텔레그램과 트위터를 통해 “우크라이나 남동부 에네르호다르에 위치한 자포리자 원전이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은 후 화재에 휩싸였다”고 밝혔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자포리자와 체르노빌 원전이 현재 러시아군의 통제에 놓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가동 중지 상태에서 폭발 가능성 낮아

우크라이나는 원전 다섯 곳에 원자로 21기를 보유 중인데 영구 정지한 북부 체르노빌 원전의 4기와 건설 중인 2기를 빼고 15기가 가동 중이다. 그중 자포리자 원전은 6기를 가진 가장 큰 원전으로, 우크라이나 전력 생산량의 약 25%를 공급한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군의 포격이 바로 원전 폭발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의 김민규 박사는 “자포리자 원전은 6기 중 5기가 가동 중단 상태여서 폭발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체르노빌 원전은 1986년 원자로 가동 시험 중 핵분열을 통제하지 못해 폭발 사고가 발생해, 엄청난 양의 방사성 물질이 유출됐다.

원전의 구조도 다르다. 원자력연구원 백원필 박사는 “러시아형 비등 경수로인 체르노빌 원전은 아예 격납 건물이란 지붕이 없어 원자로가 폭발하면서 바로 방사능 물질이 유출됐지만 자포리자 원전은 국내 원전과 같이 콘크리트 격납 건물이 있는 가압형 경수로”라고 말했다. 백 박사는 “일반적인 공격이나 화재가 큰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도 비등형 경수로로, 체르노빌 원전과 달리 격납 건물이 있었지만 불과 10㎝ 두께의 강판 패널로 이뤄진 철골 구조여서 2011년 사고에서 폭발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반면 자포리자 원전이나 국내 원전 같은 가압형 경수로는 강철 압력용기 형태의 원자로가 두꺼운 철근 콘크리트 외벽으로 이뤄진 격납 건물에 들어 있다.

국내 원전은 격납 건물 두께가 1.2m나 돼 항공기 충돌도 견딘다. 실제로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 샌디아 국립연구소는 지상에서 전투기를 격납 건물과 같은 콘크리트에 충돌시키는 실험을 했는데 내부에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한국도 2009년 국내 운항 중인 보잉과 F16 전투기가 원전에 부딪히는 컴퓨터 모의실험을 했는데 역시 원자로에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4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 내 건물이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아 불길에 휩싸여있다. /AP 연합뉴스

IAEA는 “자포리자 원전 화재가 원전의 핵심 장비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원전 주변 방사능 수치에도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도 “원전 주변 방사능 수치에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앞서 러시아군이 장악한 체르노빌 원전도 방사능 안전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4일 교전 과정에서 한때 방사능 수치가 높아졌지만 방사성 물질이 새로 유출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분석됐다. 영국 리버풀대의 브루노 머크 교수는 과학 매체 뉴사이언티스트에 “체르노빌 사고 때 나온 방사성 물질이 오랜 시간 토양에 축적됐다가 탱크가 땅을 갈아엎으면서 다시 공기 중으로 유출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핵연료 냉각 실패하면 큰 사고도 가능

다만 자포리자 원전의 안전을 낙관만 할 수는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원자력연구원 김민규 박사는 “격납 건물은 멀쩡해도 주변 냉각수 취수 시설이나 전력망이 포격으로 손상되면 냉각수 공급이 차단돼 원자로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가동 중단한 원자로에서도 약하나마 핵분열이 일어나기 때문에 계속 냉각수를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전력 공급이 끊기면서 냉각수를 주입하지 못해 발생했다. 또 러시아군이 격납 건물의 콘크리트를 관통하는 미사일이나 포탄을 사용하면 바로 대형 원전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전 세계 어느 원전도 안전 설계에서 이 같은 군사공격에 대한 대책을 고려하지는 않는다.

황일순 울산과학기술원(UNIST) 석좌교수는 “원전을 공격해 사고가 생기면 소규모 핵무기를 쓰는 것과 같은 피해가 생길 수 있다”며 “탄소 중립을 위해 원전이 확대되는 만큼 전 세계가 원전에 대한 공격은 하지 말도록 국제협약을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IAEA는 전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원전 장악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이사회 35국 중 26국의 찬성을 받아 통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