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동남부 도시 마리우폴에 러시아군이 포격을 가하자 한 병원에 있던 주민들이 복도 바닥에 황급히 엎드리고 있다. 러시아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의료 체계가 무너지면서 코로나와 결핵, 에이즈 등 감염병 환자가 크게 늘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AP 연합뉴스
지난 4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동남부 도시 마리우폴에 러시아군이 포격을 가하자 한 병원에 있던 주민들이 복도 바닥에 황급히 엎드리고 있다. 러시아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의료 체계가 무너지면서 코로나와 결핵, 에이즈 등 감염병 환자가 크게 늘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AP 연합뉴스

러시아군의 포격에도 살아남은 우크라이나인들이 감염병은 피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 의료 단체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코로나와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 결핵 환자가 급증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가 병원마저 공격하는 상황에서 환자들이 제대로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하고 대피소에 모여 있다가 감염 환자가 더 늘어나는 악순환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15일(현지 시각) “러시아 침공으로 의료체계가 파괴되고 사람들이 피난길에 오르면서 코로나와 에이즈, 결핵 같은 감염병이 퍼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사람들이 러시아군의 포격을 피해 지하실, 지하철이나 임시 대피소에 모이면서 당장 코로나 감염이 급증할 수 있다. 실제로 물과 위생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설사병 환자도 증가하고 있다. 소아마비와 홍역 환자도 늘었다. 의료시설과 도로망이 파괴되면서 결핵과 에이즈 환자들이 진단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중앙역에서 방역 요원이 기차 안에서 타지에서 온 승객들의 코로나 백신 접종 서류를 확인하고 있다./우크라이나 국경 수비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중앙역에서 방역 요원이 기차 안에서 타지에서 온 승객들의 코로나 백신 접종 서류를 확인하고 있다./우크라이나 국경 수비대

◇낮은 백신 접종율로 감염병 확산 우려

국제 기구들은 우크라이나 의료 체계의 붕괴를 우려하고 있다. 스위스에 있는 국제 기구인 결핵박멸파트너십의 루시아 디티우 대표는 네이처에 “장기적인 분쟁은 의료체계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이미 타격을 입은 의료 체계가 전쟁 앞에 완전히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지난 2일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는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침공했을 때 오미크론 확산의 정점에서 벗어나고 있었지만 전쟁 이후 코로나 진단이 급감했다”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감염 사례가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우크라이나는 코로나 백신 접종률도 낮다. 야르노 하비츠 WHO 우크라이나 책임자는 “수도 키이우의 코로나 백신 접종률은 65%이며 20%대인 지역들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현재 우리나라의 코로나 백신 접종률은 86.6%이다.

다른 감염병도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소아마비 환자가 두 명 발생했다. 19명에서 소아마비 바이러스도 검출했다. 소아마비는 이제 전 세계에서 거의 박멸됐다. 의료 체계가 열악한 아프리카도 2020년 WHO로부터 공식적으로 소아마비가 박멸됐다는 인정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난달 1일부터 3주간 어린이 14만 명에게 소아마비 백신을 접종하려 했지만 전쟁으로 중단했다.

홍역도 또 다른 위협이다. 우크라이나는 2017년부터 홍역 환자가 대량 발생해 2020년까지 11만5000여명이 감염됐다. 백신 접종률은 2020년까지 82%로 높아졌지만 아직 홍역 대량 감염사태를 막기에는 부족하다고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분석했다. 더욱이 현재 러시아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피난민이 대거 발생한 북동부 하르키우는 홍역 백신 접종률이 50%가 채 되지 않는다.

2015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어린이가 소아마비 백신 접종을 받고 있다. 러시아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의 어린이 소아마비 벡신 접종 프로그램이 중단됐다./로이터 연합뉴스

◇치료제 제때 못받아 내성 환자도 급증

우크라이나는 매년 결핵 환자도 3만2000명씩 발생한다. 그중 3분의 1이 기존 약이 듣지 않는 내성 환자이고, 22%는 에이즈까지 걸린 상태이다. 결핵균은 코로나처럼 비말(침방울)을 통해 호흡기로 감염된다. 대피소에 사람이 몰리면 코로나뿐 아니라 결핵 환자도 급증할 수 있다.

결핵 환자들은 의료기관에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수석 의료자문관인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NIAID) 소장은 5일 영국 텔레그래피지에 “러시아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병원이 지하실로 옮기거나 문을 닫으면서 결핵 환자와 에이즈, 소아 감염병 환자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는 이미 2020~2021년 코로나 대유행으로 결핵 진단과 치료 건수가 30%까지 감소했다. 여기에 전쟁까지 터지면서 더 치명적인 내성 결핵균이 출현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WHO의 우크라이나 담당관인 헤더 파포위츠는 “5년간 치료를 받지 못하면 절반이 폐결핵으로 사망한다”고 말했다.

결핵과 같이 오는 에이즈 역시 상황이 심각하다. 우크라이나는 동유럽에서 에이즈 환자가 두 번째로 많다. 인구 1%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라도 약만 제때 복용하면 정상 생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유엔에이즈합동계획(UNAIDS)의 우크라이나 책임자인 라만 하일레비치는 “우크라이나는 전쟁 전에도 에이즈 치료제 공급에 문제가 있었는데 전쟁이 이를 더 악화시켰다”고 말했다.

UNAIDS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는 2020년 말 현재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가 약 26만 명 있다. 그중 69%만 자신이 보균자인 것을 알고 있으며 약을 복용하는 사람은 57%에 그친다. 에이즈 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억제한 사람은 53%이다. UNAIDS는 2025년까지 세 가지 수치를 모두 95%로 올린다는 계획이지만 전쟁이 이를 가로막았다. 국제 기구들은 다른 나라로 피난 갈 때 에이즈 환자임을 숨기지 말고 병원 치료와 약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래야 피난민을 받은 나라들도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감염병 위기는 유럽 전체의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