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백형선

약 대신 전기나 빛 자극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전자약이 늘고 있다. 약품은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하고 화학반응에 따른 부작용도 있지만, 전자약은 인체에 한 번만 삽입하거나 필요할 때마다 착용하면 된다는 장점이 있다. 부작용도 그만큼 적다. 시장조사기관 마켓츠앤마켓츠에 따르면 세계 전자약 시장은 지난해 168억달러(약 20조5000억원)에서 2026년에는 215억달러(약 26조3000억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의 조일주 박사는 “최근 전자약이 더 정교하고 소형화되는 추세”라며 “질병 연구도 같이 발전하면 전자약으로 꼭 필요한 부위만 자극해 더 좋은 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전자약으로 난치병 치료 도전

최근 국내에서 전자약 연구 성과가 잇따라 나왔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학과의 김민석 교수 연구진은 지난 21일 전기자극으로 말초신경의 수초를 강화할 수 있는 전자약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수초는 신경세포를 보호한다. 수초가 손상되면 전기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근육 위축, 무감각, 마비 등이 생길 수 있다. 샤르코-마리-투스, 길랑-바레 증후군 등 다양한 희소 질환도 유발하지만 확실한 치료제는 없는 실정이다.

연구진은 쥐의 배아에서 수초가 형성되는 시기에 다양한 주파수의 전기자극을 주면서 수초가 강화되는 것을 확인했다. 김 교수는 “특정 전기자극이 수초 형성을 도울 수 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라며 “마땅한 약이 없는 난치병을 치료할 전자약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KIST 이수현 박사 연구진은 지난해 고려대 안암병원 안기훈 교수 연구진과 함께 조산(早産)을 조기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전자약을 개발했다. 조산은 전체 임신의 12.7%나 차지하지만 조기 진단이 어렵고 이를 막는 자궁 수축 억제제는 부작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진은 도넛 모양의 전자약을 개발했다. 임신부의 자궁경부에 삽입하면 자궁 수축 신호를 실시간으로 감지해 조산의 징후가 보일 때 전기신호를 발생시킨다. 그러면 근육이 이완되면서 자궁 수축이 억제된다. 안 교수는 “조산으로 인한 영아 사망과 후유증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성균관대 전자전기컴퓨터공학과 손동희 교수와 KIST 윤인찬 박사 연구진은 스티커 형태로 전자약을 만들어 말초신경에 붙여도 신경 압박 없이 전기신호를 수집하고 보낼 수 있도록 했다.

◇간편한 웨어러블 형태로 개발

전자약의 치료 범위는 계속 확대되고 있다. 전자약은 미국 브레인스웨이의 강박장애 치료제처럼 초기에는 주로 정신·신경 질환 치료용이 많았다. 최근에는 적용 대상이 비만·당뇨병·암과 심혈관 질환으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의료기기 스타트업들은 환자들이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웨어러블(wearable·착용형)처럼 새로운 방식의 전자약을 내놓고 있다. 신경을 자극하는 기술도 점점 정교해지면서 맞춤형 재택 치료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일렉트로코어는 미주신경(迷走神經) 자극기 ‘감마코어’를 개발했다. 미주신경은 뇌와 인체의 모든 장기 사이를 오가며 신경 신호를 전달하는 통로다. 이 기기를 간편하게 목에 대기만 하면 신경이 자극되는 방식이다. 편두통 치료뿐 아니라 최근 코로나로 인한 호흡곤란 치료에도 쓸 수 있도록 미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미 스타트업 칼라헬스의 전자약은 손목시계 형태다. 수전증 환자가 하루에 40분씩 한 달 동안 사용한 결과, 환자 절반에서 손 떨림이 2배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기업 와이브레인은 미세 전기자극을 이용해 우울증을 치료하는 전자약을 개발해 지난해 국내 허가를 받았다. 머리에 착용하는 웨어러블 방식이다. 임상시험에서 기존 항우울제보다 우울 증상 개선 효과가 좋았다고 회사는 밝혔다. 와이브레인은 치매·편두통 등 다양한 뇌질환 치료 전자약을 개발 중이다. 뉴아인은 VR(가상현실) 기기처럼 눈에 착용하는 전자약을 개발했다. 손상된 각막 조직에 미세 전류를 전달해 안구의 건조감과 염증, 통증 등을 치료하는 제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