췌장암(붉은색)에 걸리면 몇 달 살지 못한다. 증상이 나타나 진단이 되면 이미 온몸에 암세포가 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미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대

식중독균과 파상풍 신경독소가 잠들어있던 인체 면역체계를 깨워 난치병인 췌장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외부에서 침입한 적군이 방어군을 각성시켜 내부에 암약하던 강력한 적군을 물리치도록 한 것이다.

미국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대의 클라우디아 그레이브캄프 교수 연구진은 “동물실험에서 파상풍 독소가 췌장암의 전이를 87% 줄이는 데 성공했다”고 23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중개의학’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췌장암에 걸린 생쥐가 식중독균을 통해 파상풍 독소를 전달받고 암세포 크기가 80% 줄었으며, 수명도 다른 생쥐보다 40% 늘었다고 밝혔다.

◇암세포에 표지 심어 면역반응 유도

췌장암 진단을 받으면 몇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 증상이 나타나면 이미 암세포가 온몸에 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최근 인체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잘 찾아내 공격하도록 유도하는 면역치료법이 발전했지만 췌장암은 면역체계에 잘 감지되지 않아 적용하기 어렵다. 더욱이 췌장암세포는 면역반응을 억제하는 세포들에 둘러싸여 있다.

상처 부위에서 자라는 파상풍균은 신경 독소를 분비해 몸이 쑤시고 아프며 근육수축이 나타나는 파상풍을 유발한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서 파상풍 독소가 바로 암세포를 공격한 것은 아니다. 그레이브캄프 교수 연구진은 파상풍 독소를 면역반응을 촉발하는 일종의 표지로 삼았다.

연구진은 식중독균인 리스테리아가 췌장암세포에 들어가 파상풍 독소를 분비하면 면역세포인 T세포가 바로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부분 어릴 때 파상풍 예방백신을 접종받았기 때문에 T세포가 췌장암세포는 몰라도 파상풍 독소는 기억하기 때문이다.

생쥐의 체장암세포 현미경 사진. 붉은색이 암세포에 파상풍 독소를 전달한 리스테리아균이다./미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대

연구진은 먼저 암세포를 잘 찾아 감염시키는 식중독균인 리스테리아에서 독성을 없애고 파상풍 독소를 만드는 유전자를 주입했다. 리스테리아균은 독성이 약하면 면역세포의 공격을 받아 죽는다. 하지만 췌장암세포는 면역반응을 억제하는 능력이 있어 그 속에서 리스테리아균이 오래 생존할 수 있다.

먼저 나이가 들면 췌장암에 걸리도록 만든 생쥐에게 어릴 때 파상풍 백신을 접종했다. 그 다음에는 생쥐가 췌장암에 걸렸을 때 파상풍 독소를 분비할 리스테리아균을 복부에 투여했다. 예상대로 T세포가 암세포를 공격했다.

치료 효과는 항암제인 젬시타빈을 같이 투여했을 때 배가됐다. 젬시타빈은 췌장암세포를 둘러싸고 면역반응을 억제하는 세포가 증식하지 못하도록 한다. 생쥐는 치료 과정에서 별다른 부작용을 보이지 않았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난소암 생쥐에서도 치료효과 보여

연구진은 앞으로 독성을 없앤 리스테리아균을 환자의 복부에 안전하게 주입할 수 있는지 임상시험을 통해 알아보겠다고 밝혔다. 리스테리아균의 안전성이 확인되면 파상풍 독소를 분비하는 균을 췌장암 환자에게 시험할 수 있다.

그레이브캄프 교수는 “같은 방법이 면역체계가 잘 감지하지 못하는 다른 암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며 “파상풍 독소를 분비하는 리스테리아균이 난소암에 걸린 같은 생쥐에서도 매우 좋은 결과를 보였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대장암과 뇌종양으로 치료 대상을 확대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