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봄이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리는 시다. 학교에서는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소망을 담은 작품이라고 가르쳤지만, 시를 생각하면 매화나 진달래, 수선화 같은 이름이 새삼 낯설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꽃 이름을 처음 불러주는 사람은 과학자일지 모른다. 새 꽃을 찾으면 어떤 식물과 가깝고 누가, 어디에서 처음 찾았는지 뜻을 담아 학명(學名)을 붙인다. 생김새를 보고 우스꽝스러운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정적 단어는 거의 쓰지 않는다. 나쁜 말로 이름을 부르면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기 어렵다.
그런 학명에 ‘멸종’이라는 최악의 절망이 담긴 꽃이 있다. 바로 남미 에콰도르에 사는 ‘가스테란투스 익스팅크투스(Gasteranthus extinctus)’이다. 이름 뒤쪽 종명(種名)이 멸종(extinct)이란 단어에서 왔다. 이름 그대로 40년 전에 이미 멸종했다고 생각한 꽃이 다시 발견됐다.
미국 시카고 필드 자연사박물관의 나이절 피트먼 박사 연구진은 지난 15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파이토키스(PhytoKeys)’에 “지난해 11월 에콰도르 서부 센티넬라 능선의 폭포 근처에서 가스테란투스 익스팅크투스가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익스팅크투스는 1981년 처음 채집됐다. 과학자들이 2000년에 학명을 붙일 때는 이미 서식지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에콰도르 정부가 숲을 대대적으로 개간해 농지로 만들면서 서부 열대우림이 97% 이상 사라졌다. 과학자들은 미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사라진 꽃을 보고 후대에 교훈을 주기 위해 멸종이란 이름을 붙였다.
젊은 과학자들은 절망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놓치지 않았다. 일부에서 센티넬라 능선에 아직 멸종하지 않는 생물종이 있다는 보고가 나오자 익스팅크투스 역시 살아남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피트먼 박사는 에콰도르와 미국, 프랑스의 연구 기관 6곳과 손잡고 지난해 센티넬라 능선 탐사대를 꾸렸다.
40년 넘게 망각의 강 건너에 있던 꽃은 마치 찾아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정말 쉽게 발견됐다. 지난해 11월 탐사대가 센티넬라 능선에 도착한 첫날 몇 시간 만에 바로 꽃을 찾은 것이다.
처음 발견 당시 이 꽃은 네온빛 주황색 꽃잎이 특징이라고 기록됐다. 꽃 아래에는 꽃가루를 옮기는 곤충들이 드나드는 주머니가 달려 있다고 했다. 학명에서 앞쪽 속명(屬名)인 가스테란투스는 그리스어로 ‘배불뚝이 꽃(belly flower)’이란 뜻이다.
탐사대가 찾은 꽃은 당시 기록 그대로였다. 연구진은 사진을 찍고 땅에 떨어진 꽃잎을 채집해 미국의 분류 전문가에게 보냈다. 예상대로 가스테란투스 익스팅크투스였다. 연구진은 나중에 다른 숲에서도 소규모 군락지를 발견했다.
과거 센티넬라 능선은 이곳에만 자라는 식물이 최소 90종에 이를 정도로 생태계의 보고(寶庫)였다. 그 가운데 배불뚝이 꽃 가스테란투스 6종도 포함됐다. 전 세계 가스테란투스종의 5분의 1이 센티넬라 능선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규모 개간으로 센티넬라 능선의 숲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이들도 멸종했다. 세계적 생태학자인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 하버드대 교수는 생물 종이 미처 발견되기도 전에 서식지가 사라지면서 멸종하는 현상을 ‘센티넬라 멸종’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제 센티넬라 능선은 과학자들에게 저주받은 지역으로 꼽힌다.
익스팅크투스는 다행스럽게도 석학의 말이 틀릴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다. 논문 공동 저자인 필드 자연사박물관의 도슨 화이트 박사는 “이 꽃을 재발견한 것은 아무리 생태 다양성이 최악 상황에 처했어도 되돌리기 너무 늦은 게 아님을 보여준다”며 “신종은 계속 발견되고 있으며 멸종 위기에 처한 많은 종을 아직도 살릴 수 있다”고 밝혔다.
사실 생태학에는 센티넬라 멸종이란 말과 함께, 멸종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시 찾은 생물을 가리키는 ‘나사로(Lazarus·라자루스) 분류군’이라는 말도 있다. 성경에서 병으로 죽었다가 예수가 되살린 나사로에서 딴 이름이다. 지난주 호주에서는 멸종했다고 생각했던 난초가 거의 한 세기 만에 재발견되기도 했다.
꽃은 늘 희망의 상징이었다. 일제 치하 이상화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에서 이른 봄에 피는 맨드라미(작품에선 ‘민들레’의 경상도 방언)와 들마꽃(제비꽃)으로 희망을 노래했다. 코로나의 긴 터널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는 이 봄, 멸종에서 되살아난 꽃 소식이 새삼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