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원수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가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자연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개구리가 자신을 잡아먹는 뱀으로부터 DNA를 전달받은 것이다.
일본 나가하마 바이오대의 쿠라바야시 아쓰시 교수 연구진은 “지난 8500만 년 동안 뱀과 개구리 사이에서 유전물질인 DNA의 이동이 최소 54번 일어났다”고 국제 학술지 ‘분자생물학과 진화’ 최신호에 발표했다.
◇뛰어다니는 유전자가 뱀·개구리 이동
연구진은 뱀의 DNA 중 트랜스포존(transposon)이라는 부분이 진드기나 거머리 같은 기생 동물을 통해 개구리로 전달된다고 설명했다. 트랜스포존은 DNA에서 자신을 잘라내 다른 곳에 갖다 붙이는 부분으로, 뛰어다니듯 염색체에서 위치를 쉽게 바꿔 ‘도약 유전자(jumping genes)’라고도 불린다.
트랜스포존은 198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바버라 매클린톡 전 코넬대 교수가 옥수수에서 처음 발견했다. 노란 옥수수에서 옥에 티처럼 군데군데 박혀있는 검붉은 낱알이 바로 트랜스포존 때문이다. 서로 다른 종 사이에 트랜스포존을 통한 수평적 DNA 이동은 미생물에서나 일어나는 드문 현상으로 여겨졌지만 최근 DNA의 이동이 모든 생물 진화과정에서 일어난다는 증거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BovB(Bovine-B)’라는 트랜스포존이다. 소(bovine)의 유전체 중 18%를 차지하며, 1980년대 처음 발견됐다. 이후 1990년대에 이 트랜스포존이 뱀에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과학자들은 4000만~5000만 년 전 뱀의 BovB가 소로 수평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일본 연구진은 아프리카 동쪽의 섬나라인 마다가스카르에서 개구리가 BovB 트랜스포존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트랜스포존의 염기서열은 이곳에 사는 뱀과 95% 일치했다.
연구진은 기생동물이 DNA 이동을 매개했다고 보고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뱀 106종과 개구리 149종, 거머리와 진드기, 회충 등 기생동물 42종의 DNA를 해독했다. 분석 결과 BovB 트랜스포존이 8500만 년 전에서 130만 년 전 사이에 최소 54번이나 뱀에서 개구리로 이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연구진은 마다가스카르가 DNA 수평 이동의 중심지였다고 설명했다. 이 섬에 사는 개구리의 91%가 BovB를 갖고 있으며, 지난 5000만 년 동안 14번이나 BovB가 개구리 유전자에 침입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같은 기간 아프리카 본토에서는 BovB 트랜스포존이 개구리 유전자로 도약한 일이 단 한 번 일어났다.
◇바이러스 통해 몸 전체로 퍼졌을 듯
트랜스포존의 수평 이동은 다양한 기생동물이 매개했다. 거머리와 진드기, 회충 등이다.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기생동물 종은 절반이 BovB를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기생 동물은 그 비율이 3%도 안 된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쿠바라야시 교수는 “이 지역에서 질병이 퍼지면서 기생 동물이 늘어나 DNA의 수평 이동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미국 콜로라도대의 아트마 이반세비치 교수는 이번 연구에 대해 아직 DNA의 수평 이동을 직접 매개한 생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뱀과 개구리, 거머리, 진드기에서 같은 BovB가 발견됐다고 바로 기생 동물이 BovB를 전달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반세비치 교수는 뱀과 개구리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BovB가 징발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려면 BovB가 생식세포를 통해 후손에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기생 동물은 주로 소화기에 감염된다.
쿠바라야시 교수는 기생동물에 있는 바이러스가 BovB DNA를 개구리에 가져가서 다른 조직으로 퍼졌다고 추정했다. 그러면 생식세포로도 트랜스포존이 전달될 수 있다. 앞으로 마다가스카르의 바이러스를 조사해 이를 확인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