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 독감 대유행을 부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전자현미경 사진. 당시 전 세계에서 최대 1억명이 독감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미 CDC

20세기 최악의 전염병을 유발한 독감 바이러스가 독성이 약화된 형태로 지금도 해마다 창궐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코로나가 약한 풍토병(엔데믹)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이 이미 독감에서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의 토르스텐 볼프 박사 연구진은 11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오늘날 겨울마다 퍼지는 인플루엔자(독감) 바이러스는 1918년 독감 대유행을 일으켰던 바이러스의 직계 후손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박물관 유물에서 바이러스 유전자 찾아

독일 연구진은 1901~1931년 독감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폐 시료 13점을 분석했다. 이중 3점은 1918년에 사망한 사람에서 나왔다. 시료는 베를린과 오스트리아 빈의 박물관에서 보관하던 것이었다. 유전자를 해독한 결과, 오늘날 계절 독감 바이러스가 1918년 시료에서 나온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직계 후손으로 나타났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1918~1920년 인플루엔자 대유행으로 전 세계에서 최대 1억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이번 코로나 사망자가 지난해 말 기준으로 1500만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1918 독감은 인류 역사상 14세기 흑사병 다음으로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불리지만 아직도 기원이 불분명하다.

1918 독감은 1차대전이 끝나면서 전 세계로 이동한 병사들이 퍼뜨렸다고 추정된다. 그럼에도 당시 각국 정부는 병사들의 사기 저하를 우려해 독감 유행을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언론통제가 느슨했던 스페인에서 독감 보도가 잇따르면서 애꿎게 지금도 ‘스페인 독감’이라고 불린다. 과학자들은 1933년에야 바이러스가 1918 독감의 원인임을 알아냈다.

1918 독감 대유행 당시 환자로 가득한 미국 캔사스주의 병원 응급실./미 국립보건의학박물관

◇돌기보다 안쪽 단백질에 변이 나타나

연구진은 1918년 시료를 그 뒤 2차 대유행 시기의 미국 알래스카 시료와도 비교했다. 1990년대 알래스카의 영구동토층에서 1918 독감으로 사망한 사람의 시신이 온전하게 발견됐다.

과학자들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인체 감염력을 높이기 위해 표면의 헤마글루티닌(hemagglutinin, HA) 단백질을 진화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이러스는 헤마글루티닌으로 인체 세포에 달라붙으며, 증식 후 세포를 뚫고 나올 때는 뉴라민분해효소(neuraminidase, NA)를 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이 표면 단백질의 종류로 분류한다. 1918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두 단백질이 모두 1형인 H1N1형으로, 2009년 신종 플루 대유행을 부른 바이러스와 같다.

유전자를 비교해보니 예상과 달리 1918 H1N1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나중에 유전물질을 감싸고 있는 핵단백질에 돌연변이가 생겼다.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물질인 인터페론이 핵단백질을 공략한다는 점에서 이 같은 돌연변이는 바이러스가 인체 면역체계를 피하기 위해 진화한 결과로 해석됐다. 볼프 박사는 “알래스카 바이러스는 베를린 바이러스보다 두 배는 더 강력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에도 불구하고 1918 독감은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더 많다. 바이러스에 인체 면역반응을 회피하는 돌연변이가 나타났지만 1918년 대유행 이후 독감 사망자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볼프 박사는 “인구 상당수가 전염병에 면역을 가진 집단면역에 도달했거나 아니면 바이러스가 어떤 이유로 점점 독성이 약해졌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