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黑死病)이 중앙아시아의 한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은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지역이어서 중세 무역상들이 흑사병을 유럽으로 퍼뜨린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요하네스 크라우스 박사와 영국 스털링대의 필립 슬라빈 교수 공동 연구진은 16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14세기 무덤을 통해 중앙아시아 키르기즈스탄에서 유럽을 휩쓴 페스트균이 시작됐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역사학자와 과학자의 협업 성과
흑사병은 쥐와 벼룩이 옮기는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 유발하는 감염병으로, 종류에 따라 치명율이 30~60%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1346~1353년 유럽에서 일어난 페스트 대유행인 흑사병으로 50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환자의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붙여졌다.
이번 연구는 역사학자와 과학자의 협업을 통해 진행됐다. 1886년 러시아 학자들이 키르키즈스탄 북쪽의 이식 쿨 호수 근처에서 1338년 매장된 무덤을 발굴했다. 무덤의 묘비에는 시리아어로 ‘이곳은 역병으로 죽은 신자 산마크의 무덤’이라고 적혀있었다.
중세사 연구자인 슬라빈 교수는 러시아 발굴단의 기록을 통해 당시 산마크를 포함해 최소한 118명의 상인이 역병으로 죽었음을 확인했다. 슬라빈 교수는 “이곳이 흑사병이 시작된 곳임을 100% 확신했다”고 밝혔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1346년 몽골군이 흑해 크림반도의 카파항을 포위 공격하면서 유럽에 흑사병이 퍼졌다. 당시 몽골군은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을 성안으로 던졌다고 한다. 생물학 무기를 쓴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흑사병이 아시아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다.
과학자들도 DNA 연구를 통해 같은 주장을 폈다. 유럽의 흑사병 희생자들에서 나온 페스트균이 돌연변이가 많이 생긴 상태였다는 점에서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고 추정됐다. 진원지는 중앙아시아로 지목됐다. 그곳에 있는 설치류에서 나온 페스트균이 유럽 페스트균의 시조로 추정되는 종류와 유전자가 흡사했기 때문이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 과학자들은 슬라빈 교수의 발표를 듣고 키르기즈스탄 무덤의 유골에서 페스트균 시조의 DNA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구진은 유골의 치아에서 DNA를 추출해 분석했다. 무덤에서 나온 DNA는 10년 뒤유럽을 휩쓴 페스트균들이 돌연변이를 일으키기 전의 형태와 일치했다. 예상대로 그곳이 흑사병의 빅뱅이 일어난 장소였던 것이다.
크라우스 박사는 기자회견에서 “중국 우한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후 알파와 델타, 오미크론 등 모든 변이를 낳은 것처럼 키르기즈스탄의 무덤은 모든 흑사병이 시작된 곳”이라고 밝혔다.
◇설치류 폭증으로 대유행 불러
연구진은 무덤에서 나온 페스트균이 오늘날 이식 쿨 호수 근처에 사는 설치류의 페스트균과도 유사하다는 점에서 설치류의 페스트균이 사람에게 옮겨오면서 흑사병이 시작됐다고 추정했다. 연구진은 기상이변으로 텐샨 산맥의 마멋이 폭증하면서 실크로드를 오가던 무역상들에게 페스트균을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텐산 산맥은 남으로는 키르기즈스탄, 북으로는 카자흐스탄, 동으로는 중국과 접해있다. 키르기즈스탄 무덤은 무역상들이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던 실크로드에 가까운 곳에 있다. 실제로 키르기즈스탄 무덤에서는 인도양에서 나온 진주나 지중해의 석탄, 여러 나라의 동전 등이 출토됐다. 페스트균은 무역상을 통해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 도시로 갔고, 그곳 쥐들에 퍼지면서 흑사병이 창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