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黑死病)이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은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지역이어서 중세 무역상들이 흑사병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퍼뜨린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요하네스 크라우스 박사와 영국 스털링대의 필립 슬라빈 교수 공동 연구진은 지난 16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14세기 무덤을 통해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유럽을 휩쓴 페스트균이 시작됐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페스트는 쥐와 벼룩이 옮기는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 유발하는 감염병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1346년 몽골군이 흑해 크림반도의 카파항을 포위 공격하면서 유럽에 흑사병이 퍼졌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14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페스트 대유행인 흑사병으로 50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환자의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붙었다.
이번 연구는 역사학자와 과학자의 협업을 통해 진행됐다. 1886년 러시아 학자들이 키르키스스탄 북쪽의 이식 쿨 호수 근처에서 1338년 매장된 무덤을 발굴했다. 무덤의 묘비에는 시리아어로 ‘이곳은 유행병(페스트)으로 죽은 신자 산마크의 무덤’이라고 적혀있었다.
중세사 연구자인 슬라빈 교수는 러시아 발굴단의 기록을 통해 당시 산마크를 포함해 최소한 상인 118명이 유행병으로 죽었음을 확인했다. 슬라빈 교수는 “이곳이 흑사병이 시작된 곳임을 100% 확신했다”고 밝혔다.
과학자들은 유럽의 흑사병이 다른 곳에서 옮아왔다고 추정했다. 당시 희생자들에서 나온 페스트균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많이 생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진원지는 중앙아시아로 지목됐다. 그곳에 있는 설치류에서 나온 페스트균이 유럽 페스트균의 시조로 추정되는 종류와 유전자가 흡사했기 때문이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 과학자들은 슬라빈 교수의 발표를 듣고 키르기스스탄 무덤의 치아에서 DNA를 추출해 분석했다. DNA는 이후 유럽을 휩쓴 페스트균이 돌연변이를 일으키기 전 형태와 일치했다. 예상대로 그곳이 흑사병의 빅뱅이 일어난 장소였던 것이다.
막스 플랑크연구소의 크라우스 박사는 “중국 우한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후 알파와 델타, 오미크론 등 모든 변이를 낳은 것처럼 키르기스스탄의 무덤은 모든 흑사병이 시작된 곳”이라고 밝혔다.
무덤에서 나온 페스트균은 오늘날 이식 쿨 호수 근처에 사는 설치류의 페스트균과도 유사했다. 연구진은 14세기 기상이변으로 텐샨 산맥에서 설치류인 마멋이 폭증하면서 실크로드를 오가던 무역상들에게 페스트균을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