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 아주대 수학과 석좌교수는 8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 본사에서 가진 인터뷰에서“한국 수학이 그동안 선진국 수준으로 도약하면서 허준이 교수의 필즈상 수상이 예견됐다”며 “초·중·고교 수학교육도 문제 수를 줄이고 풀이 방식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바꿔 제2, 제3의 허준이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박상훈 기자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지난 5일 국제수학연맹(IMU)에서 한국인 최초로 ‘필즈상을 받았다. 필즈상은 4년마다 수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연구 업적을 쌓은 40세 미만 수학자에게 수여하는 수학계 최고 권위상이다. 노벨상에는 수학 분야가 없어 수학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리드 추측’ 등 수학 난제 11가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박형주(58) 아주대 수학과 석좌교수는 지난 8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다들 한국에서 필즈상보다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먼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년 전부터 필즈상이 먼저일 거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박형주 교수는 한국 수학의 세계화를 이끈 주역이다. 그는 세계수학자대회 유치위원장을 맡아 2014년 대회를 서울에 유치했다. 이 과정에서 세계 수학계에 한국 수학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알렸다. 박 교수는 “당시 세계 학계가 매달린 핵심 문제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가 늘어나고 수학과에 인재가 몰리는 것을 보고 가까운 시간 내 수상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한국 수학 수준이 선진국 반열에 오르면서 허준이 교수의 필즈상 수상은 예견된 일이었다는 것이다.

40년 만에 수학 선진국 반열 올라

-한국 수학 수준이 그렇게 높았나.

“필즈상은 국제수학연맹이 선정해 4년마다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에서 수여한다. 수학연맹은 82국 회원국을 5등급으로 나눠 등급만큼 투표권을 준다. 한국은 1981년 1군으로 가입했고, 올 초 최고 등급인 5등급에 올랐다. 우리나라는 2014년 세계수학자대회까지 열었다. 허 교수는 이미 2018년 수학자대회부터 필즈상 수상 후보로 꼽혔다.”

-필즈상 수상은 한국 수학의 성과인가.

“허 교수는 유학 간 부모 밑에서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국내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석사까지 마쳤다. 미국 박사 과정에서 1968년 이래 수학계의 오랜 난제였던 리드 추측을 증명해 일약 수학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한국 석사 과정에서 증명한 대수기하학 문제가 다른 수학 분야인 조합론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고 같은 방법으로 푼 것이다.”

-한국에서 이미 세계 학계의 주류 문제를 접한 것인가.

“세계수학자대회 유치 활동을 하면서 2007년에 세계 최고 학술지의 편집자로 활동하는 한국 수학자와 그런 학술지에 발표하는 논문 수를 조사했다. 그때 이미 세계 10위권으로 양적 성장한 것을 인정받아 수학연맹 2등급에서 바로 4등급에 올랐다. 2014년 서울 세계수학자대회를 맞아 다시 조사했더니 논문 주제들도 세계 학계가 매달린 핵심 문제들이었다. 질적 발전까지 이룬 것이다.”

박형주 교수는 세계수학자대회 유치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수학을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사진은 2014년 서울 세계수학자대회에서 박형주 조직위원장이 개회사를 하는 모습. /세계수학자대회

학부모들이 이미 수학의 비전 파악

-대학 수학과에 벌써부터 인재가 몰렸다는 말인가.

“주요 대학에서 수학과는 입학 점수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예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수학과 나오면 학원 선생밖에 못 한다는 말을 들었다. 학부모들이 수학과 진학을 뜯어 말렸다. 그런데 이제는 학부모까지 수학과가 비전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 분야 올림피아드 수상자들은 의대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학올림피아드 수상자들은 거의 70%가 수학과로 진학하고 나머지도 공대 등 이공계로 간다.”

-수학과 교수나 연구원은 수가 적지 않은가.

“대학이나 정부 연구소 자리는 부족하다. 하지만 기업은 다르다. 빅데이터(대용량 정보)와 인공지능 전문가가 부족해지자 기업들이 논리적 훈련과 숫자에 익숙한 수학과 출신들을 대거 투입하고 있다. 금융이나 정보 보안 분야에서도 수학과 출신들이 활약하고 있다. 내가 있는 아주대는 재작년 전체 취업률 1위가 수학과였다.”

-수학의 인기를 언제부터 실감했나.

“서울 세계수학자대회에 미국 헤지펀드인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의 제임스 사이먼스 명예회장을 초청해 강연을 열었다. 사이먼스 회장은 뉴욕주립대 수학과 교수 출신으로, 지난해 블룸버그 억만장자 인덱스에 자산 약 33조원으로 세계 66번째 부자로 등재됐다. 그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자비(自費)로 한국에 왔다. 그 강연에 학부모들이 아이들 손잡고 4000여 명 운집했다. 세상은 이미 수학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먼스 회장은 한국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뭐라고 했나.

“자신이 가장 잘한 결정이 어릴 때 주치의가 의사가 되라고 한 조언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수학으로 금융의 프레임을 바꾸고 엄청난 돈을 벌어 의사가 평생 치료하는 환자보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사이먼스 회장은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세워 미국 빈민가 학교에 유명 대학 출신 교사를 초빙해 정부 봉급만큼 더 지원했다. 빈민가 아이들에게 교육의 사다리를 제공한 것이다.”

빨리 많이 풀기보다 깊게 생각해야

-하지만 한국 중·고교 수학교육은 수학포기자(수포자)만 양산하고 있다.

“허준이 교수는 고교에서 시간을 갖고 시행착오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누구보다 재능을 보였지만, 정해진 시간에 많은 문제를 빨리 푸는 것은 영 시원찮았다고 했다. 이런 학생에게 입시를 위해 1시간에 문항 20개를 실수 없이 풀라고 끊임없이 연습시키면 끔찍할 수밖에 없다.”

-보통 학생과 영재 모두에게 좋은 수학교육은 무엇일까.

“국가교육과정개정추진위원장을 맡고 있어 지금도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많은 문제를 선다형으로 푸는 방식도 일반 학생들에게 반복 학습을 통해 자신감을 줄 수 있지만, 창의성 있는 학생일수록 반복을 싫어한다. 그런 학생에게는 문제 수를 3분의 1로 줄이고 대신 난이도 높은 서술형으로 주면 된다. 두 가지 방식을 병용하자는 것이다.”

-그래도 누구나 수학은 일단 멀리한다.

“문제 수를 줄이면 학생들이 반복 학습을 좀 덜 해도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교사들이 변별력을 높이려고 어려운 문제 몇 개를 많은 문제에 섞어 내기 때문이다. 이러니 아이들이 지긋지긋해할 수밖에 없다. 이게 수포자 원인의 90%가 된다. 나는 수학은 몇 점 이상 되면 다 만점 받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질서 이해하면 응용 무궁무진

-일반인에게 수학의 가치를 설명한다면.

“수학으로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면, 자연을 길들일 수 있다. 그러면 당연히 이를 활용하는 후속 연구가 나올 수밖에 없다. 허준이 교수의 연구도 상이한 수학 분야에서 어떤 패턴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을 증명한 성과이다. 자연의 다른 곳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해결할 문제가 많을 것이다.”

-허준이 교수의 연구도 응용 가능성이 있나.

“필즈상은 그리스 시대부터 시작된 정수론에서 많이 나왔다. 허준이 교수는 중세에 시작된 조합론에서 처음 필즈상을 받았다. 경우의 수를 따지는 조합론은 네트워크를 다루는 통신, 인터넷 분야에서 굉장히 많이 응용된다. 이미 미국 컴퓨터 과학자들이 허 교수 연구를 이용해 알고리즘의 작동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한국에서 제2, 제3의 허준이가 나올 수 있을까.

“허 교수는 대학 3학년 때 전 과목 D, F 학점을 맞고 우울증까지 걸렸다고 했다. 그런 그를 김영훈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가 알아보고 수학으로 이끌었다. 김 교수는 한국 최초로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메달을 딴 수학 영재 출신이다. 멘토가 그만큼 중요하다.”

-필즈상 수상자도 이미 허 교수의 멘토였다고 들었다.

“허 교수는 서울대에서 히로나카 헤이스케 하버드대 명예교수의 수학 강의를 듣고 감명받았다고 했다. 그는 1970년 필즈상 수상자다. 히로나카 교수의 처가는 유명한 정치가 집안이다. 아내는 히로나카 교수에게 서울대에서 받은 돈을 다 쓰고 오라고 했다고 한다. 히로나카 교수는 그 말대로 허준이 교수 같은 학생들과 밥 먹고 음악회 같이 가고 나중에 거액을 학교에 기부했다. 과학의 대형 연구 장비처럼 해외 석학은 수학의 훌륭한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이번 필즈상 발전이 한국 과학 발전에도 도움이 될까.

“수학의 핵심 문제에 매달린 젊은 수학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필즈상에 대한 희망을 가졌듯 과학에서도 남들을 따라가지 않고 학계의 난제에 뛰어드는 연구자들을 키워야 한다. 최근 트렌드는 학문의 틀을 깨는 것이다. 학과의 장벽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허 교수처럼 전공을 뒤늦게 바꾸는 것을 이상하게 보지 말아야 한다. 내가 물리학과를 다니다 수학을 전공하겠다 했을 때 교수들이 이해 못 했다. 허 교수는 그와 달리 새로운 길을 이끈 스승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