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근과 전염병이 인류가 보편적으로 우유를 소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Pixabay

우유가 인류의 필수 영양분이 된 것은 기근과 질병 덕분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우유 속 젖당을 분해할 수 있는 사람은 기근과 질병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단기간에 우유 소화 능력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영국 브리스톨대의 리처드 에버셰드 교수가 이끈 국제 공동 연구진은 28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선사시대 유럽인은 젖당 분해 효소가 진화하기 전부터 우유를 소비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에는 20국 100여명의 과학자가 참여했다.

기원 전 1000년까지도 젖당 분해 효소를 가진 사람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자료=Nature

9000년 전부터 우유 소비 시작

젖당 분해 효소는 우유 속 젖당을 소화하기 좋은 포도당과 갈락토스로 분해한다. 젖먹이는 모두 젖당 분해 효소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 모유를 먹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성인이 돼서도 우유 속 젖당을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이 진화하면서 인류가 우유를 소비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번 연구진은 이와 달리 선사시대 유럽인은 젖당 분해 능력이 없어도 계속 우유를 마셨다고 주장했다.

연구진은 먼저 유럽 고고학 유적지 554곳에서 발굴된 1만3181점의 도기 파편에서 동물성 지방 시료 6899점을 추출했다. 이를 통해 유럽에서는 지금으로부터 9000년 전인 기원전 7000년 무렵 신석기시대부터 우유 소비가 시작된 것으로 밝혔다. 목축 집단이 진출한 유럽 남동부 튀르키예에서 처음 우유를 소비한 흔적이 발굴됐다.

연구진은 동시에 선사시대 유럽인과 아시아인 1786명의 DNA 분석 결과를 통해 젖당 분해 능력이 언제 진화했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어머니 젖을 떼고 성인이 돼서도 젖당을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은 기원전 4700~4600년 전 처음 나타났지만 기원전 1000년까지도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선사시대 유럽인은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면서도 계속 마셨던 셈이다.

파란색으로 갈수록 더 오래된 곳이다. /자료=Nature

기근과 전염병이 우유 소화력 퍼뜨려

연구진은 두 가지 분석 결과를 토대로 젖당 분해 능력이 진화하면서 우유 소비가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대신 기근과 질병이 젖당 분해 능력의 진화와 더 깊은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평소라면 우유를 소화하지 못해도 불편한 정도에 그쳤겠지만 기근이나 질병이 만연한 시기에 젖당 분해 능력이 없는 사람은 설사나 위경련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라고 연구진은 추정했다. 영양실조나 감염 상태에서 설사로 탈수 증상이 나타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젖당 분해 효소를 가진 사람이 자연선택되면서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인구가 감소한 시기를 기근이 일어났다고 보고 이때 일반적인 선택압력보다 젖당 분해 능력의 진화를 689배나 더 잘 설명했다고 밝혔다. 반대로 인구밀도가 높아 질병이 퍼지기 쉬웠던 곳에서는 젖당 분해 능력의 진화가 289배나 더 잘 일어났다.

젖당 분해 효소가 진화하면서 우유 소비가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오늘날 젖당 분해 효소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중에 우유를 마시지 않는 비율이 각각 6.8%와 8%로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에버셰드 교수는 사전 브리핑에서 “사람들은 우유를 소화하지 못해도 영양의 이점 때문에 우유를 마신다”며 “일반적으로 젖당 분해 능력이 없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선사시대 유럽인도 같은 이유로 일찍부터 누구나 우유를 마셨지만 기근과 전염병을 거치면서 젖당 분해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자연선택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