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2년 8월 11일 남아메리카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 우주기지에서 한국의 첫 인공위성 ‘우리별 1호’가 발사됐다. 척박한 연구 환경 속에서도 우주 개발에 겁 없이 도전장을 던진 카이스트(KAIST) 출신 20대 연구원들이 성공의 주역이었다. 이제 중년이 된 당시의 청년들이 카이스트에 30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위성 기업인 쎄트렉아이의 박성동 전 이사회 의장을 포함해 기업과 연구원 학계에서 우주 산업 발전을 이끌어 온 27명이다. 카이스트는 18일 “이들은 우리별 1호 발사 30주년이라는 뜻 깊은 의미를 담아 30억원의 발전 기금을 약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기부에 참여한 이들은 1980년대 우주 산업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우리 위성을 만든 과학자들이다. 그 시작은 1989년 여름, 과학기술대학(현 카이스트) 교내 게시판에 붙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을 개발할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우수한 학생을 뽑아 영국 서리대에 보내 위성 기술을 배워오게 한다는 것이었다. 1차 유학생으로 김성헌(코넬대 교수), 김형신(충남대 교수), 박성동(전 쎄트렉아이 이사회의장), 장현석(SI 디텍션 대표), 최경일(KTSAT 최고기술책임자) 5명이 뽑혔다. 당시 카이스트에 인공위성연구센터를 세운 최순달 교수는 이들에게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넉넉하지 않은 지원금으로 유학 생활을 해야 했던 학생들은 햄버거 가게와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스승의 말처럼 죽기 살기로 위성 기술을 배웠다.
우리별 1호 제작까지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1년 남짓. 1기 유학생을 포함한 11명의 연구진은 실험실에서 밤을 새워가며 결국 우리별 1호 발사를 성공시켰다. 카이스트 인공위성연구센터는 1996년까지 영국 런던대, 일본 도쿄대, 미국 컬럼비아·아이오와대로 총 27명을 유학 보내 위성 관련 기술을 배워오게 했다. 이후 우리별 2호(1993년)와 3호(1999년)를 잇따라 발사했다.
이들의 열정 덕분에 한국 위성 기술은 한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 위성을 연구하고 만든다는 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힘겨운 일이었다. 당시 카이스트 인공위성연구센터의 직원 50여 명은 모두 계약직 신분이었고, 정부가 위성 사업 계약을 끊으면서 직원들이 월급도 받지 못하는 상황도 생겼다. 개발한 위성들에 대해 ‘100억원짜리 값비싼 장난감’이란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일부 연구원은 결국 자립을 택했다. 1999년 민간 위성 기업 쎄트렉아이를 창업한 것이다. 세간에서는 ‘한국에서 무슨 위성 사업이냐’고 했지만 회사는 급성장했다. 25명으로 시작한 직원은 현재 300명이 넘었고, 창업 이후 3억달러 이상의 누적 해외 수주액을 기록했다. 우리별 위성 연구에 참여한 다른 과학자들도 학계와 기업 등으로 진출해 우주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이들의 기술 축적 덕분에 올해 국산 발사체 누리호와 달 궤도선 다누리의 발사가 가능했다는 것이 과학계의 평가다.
카이스트 인공위성연구센터를 설립한 최순달 교수는 유학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공부하는 데 들어간 비용 중 일부는 시장에서 채소나 생선을 파는 할머니의 주머니에서 나왔음을 명심해라. 받은 혜택의 곱절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가져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쎄트렉아이 창업 멤버인 박성동 전 의장을 포함한 27명은 그 말을 잊지 않았다. ‘우리별 위성 연구 기금’이란 이름이 붙은 이번 기부금은 우주 분야의 혁신적·창의적 기술 연구를 위해 사용된다. 정부에서 공식적인 예산을 받는 연구 과제가 되기 전 단계의 아이디어나 시작품을 개발하는 수준의 선행 연구를 뒷받침하려는 목적이다.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은 “우리별 위성 개발이라는 모험에 뛰어들어 성공의 역사를 써 내려간 연구진의 의지를 이어받아 우주 기술 분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