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백악관이 ‘국가 생명공학 및 바이오 제조 이니셔티브’ 행정명령 배경으로 ‘원료 의약품’ 수급난을 명시하면서 우리나라도 원료 의약품의 낮은 자급률(자급도)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앞서 지난 12일(현지 시각) 백악관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바이오 분야의 미국 내 생산 강화를 뼈대로 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고 밝히면서 “미국은 해외의 원재료와 바이오 생산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고, 생명공학 등 주요 산업의 오프쇼어링(생산기지 해외 이전)은 원료 의약품 등 수급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했다.
◇국내 자급률 36%…중·일·인도서 수입
원료 의약품(Active Pharmaceutical Ingredient·API)은 완제 의약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원료로 합성·발효·추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제조된 물질을 뜻한다. 예컨대 완제 의약품인 해열진통제의 핵심 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이나 이부프로펜이 원료 의약품이다. 원료의약품 생산업체를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에 비유하는 이유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원료 의약품 자급률이 20~30%에 머물러 글로벌 공급망이 무너질 경우 타격을 입을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가장 최근 집계에 따르면, 2011~2020년 원료 의약품 자급도는 평균 27%다. 2019년에는 16.2%까지 떨어졌다 2020년 36.5%로 오른 상태다. 원료 의약품을 생산하는 국내 업체 수는 2011년 371곳에서 2020년 272곳으로 99곳 줄었다. 같은 기간 원료 의약품 수입액은 19억8148만 달러(약 2조7592억원)에서 22억2616만 달러(약 3조999억원)로 늘었다. 2020년 기준 원료 의약품 수입액 비중은 중국(37.5%), 일본(11.7%), 인도(10.5%) 순으로 중국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수급 불안으로 생산 지연 현실화
원료 의약품 수급 불안에 따른 생산 차질도 현실화하고 있다. 중추신경용 약으로 분류되는 알포아티린리드캡슐은 최근 원료의약품 수급이 어려워져 국내 생산이 지연되고 있다. 유럽에서 들여오는 핵심 제약 성분이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공급망이 불안정해지면서 국내 제약사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같은 중추신경계 약인 쎄레빅스주사(2mL)도 원료의약품 수급 지연으로 일시 품절 사태를 빚었다.
앞서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초기엔 중국과 인도의 원료 의약품 수출 제한으로 글로벌 제약업계가 수급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국내 제약업계에서는 원료 의약품의 공급망 마비가 국가 안보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성경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항생제, 해열제, 항염증제에 쓰이는 원료 의약품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 국민 보건에 직결된다”고 했다.
◇해외 의존도 줄여 공급망 마비 대비해야
제약 업계에선 당장 국내 생산이 어려운 원료 의약품에 대해서는 정부가 품목별 수입 의존도를 정밀하게 분석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수입선이 한두 나라에 불과한 품목을 우선적으로 선별해 수입선 다면화 전략을 세우고, 글로벌 공급망 붕괴 사태를 대비해 다른 나라와 스와프 협정 등 비상 공급망 구축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엄승인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상무는 “미국의 바이오 행정명령은 원료 의약품 자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는 계기가 된다”며 “원료 의약품의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기술개발부터 생산설비, 유통, 사용까지 전방위적인 종합 지원대책이 시급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