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회사 화이자의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한 우구어 자힌과 외즐렘 튀레치 부부, 모더나를 창업한 로버트 랭어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석좌교수,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제인 ‘렘데시비르’를 개발한 길리어드 사이언스(社) 설립자 마이클 라이어든. 이 네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의사면허를 소지한 바이오·신약 연구 전문가, 이른바 의사과학자(Physician Scientist, MD-PhD)라는 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의사과학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의대 졸업생 대부분이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의사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KAIST와 포스텍 등 연구중심 대학,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의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도 국정 과제의 하나로 의사과학자 양성을 꼽았고, 내년 초 본격 정책 수립에 나설 계획이다. 반면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의사 단체들은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의사과학자는 얼마나 중요하고, 의사들은 왜 반대하는 것일까.
◇바이오·신약 연구 이끄는 의사과학자
의사과학자는 바이오·신약 연구의 핵심이다. 질병 연구에는 쥐·토끼·원숭이 같은 동물실험이 널리 활용된다.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물실험에서 검증된 효과가 사람에게도 똑같이 나타나지 않거나 오히려 해를 끼치는 일이 많다. 미국심장학회가 221건의 동물실험을 검토한 결과 사람에게서 동일한 효과가 나타난 경우는 50%에 불과했고, 신약 후보 물질의 30%는 동물에게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사람에게는 독성을 나타냈다. 이 때문에 최근 글로벌 제약사와 해외 대학들은 바이오·신약 연구에 사람 몸을 잘 이해하는 의사과학자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코로나 백신 개발 과정은 물론 기초 연구에서도 의사과학자들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최근 30년간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가운데 22명이 의사과학자였다. 의사과학자인 김하일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는 “바이오·신약 산업은 기초과학과 응용 연구가 동시에 진행된다는 특징이 있다”면서 “한국의 바이오 산업이 선진국에 비해 발전 속도가 더딘 것은 의사과학자 부족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해외 각국은 이런 의사과학자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아채고 전문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미국은 1960년대부터 약 120개 의대에서 의사과학자 양성 과정을 도입했다. 매년 1700명의 의사과학자가 배출되고, 이 가운데 83%가 임상의가 아닌 의사과학자로 일한다. 이들은 의대에 남아 기초연구를 진행하는가 하면 제약사의 핵심 연구 인력이 되거나 스타트업을 창업한다. 지난해 기준 미국 투자유치 상위 20대 바이오 스타트업 가운데 7곳이 의사과학자가 창업한 회사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런던대·맨체스터대, 일본 도쿄대·교토대·홋카이도대, 이스라엘 테크니온 공대·히브리대 등도 의사과학자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의 의사과학자 고작 700명
김철홍 포스텍 IT융합공학과 교수는 “한국의 현 시스템에서는 의사과학자를 육성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1년에 한국에서 배출되는 의사는 의대와 치의대를 합쳐 3800여 명 수준인데, 이 가운데 30여 명만 의사과학자가 된다. 한국의 의사과학자는 700여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미국에서 한 해 배출되는 숫자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원인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김무환 포스텍 총장은 “종합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의사의 연봉은 2억~3억원 수준이고, 개원을 할 경우에도 억대 이상 연봉을 벌 수 있다”면서 “반면 기초의학을 하는 교수의 연봉은 절반 이하이고, 그마저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 다시 임상의사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교육부의 의과학자 육성 사업 등 다양한 정책이 과거에도 도입됐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폐지되는 일이 반복돼 왔다. 정부와 대학들은 이런 구조를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아예 별도의 의사과학자 양성 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21일 포스텍을 찾아 “우수한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해서는 임상과 기초과학, 공학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하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환자 중심의 의대가 아니라 의사과학자에 특화된 교육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KAIST·포스텍, 의대·병원 설립 추진
KAIST와 포스텍은 이번 기회에 의대를 설립해 의사과학자 양성을 주도하겠다는 포부다. KAIST는 현재 운영하고 있는 의공학 중심의 의공학대학원을 2026년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과기의전원)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교육과정은 공학 30%, 의학 70% 비율로 짜인다. 이광형 KAIST 총장은 “일반 공대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4년간 의학·공학 과정을 융합해 가르친 후 의사 자격증을 부여하고 이후 4년간 공학박사를 취득하게 하는 총 8년 과정으로 운영할 계획”이라며 “졸업 후 연구를 계속하거나 스타트업을 창업하는 미국식 모델을 한국에도 뿌리내리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KAIST는 의대 교육을 위해 정부 연구기관인 원자력의학원과의 통합도 고려하고 있다. KAIST 관계자는 “원자력의학원의 원자력병원을 활용하면 새 병원을 건립하지 않고 부속병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포스텍은 의대와 병원을 동시에 추진할 계획이다. 내년 의과학대학원을 개원한 뒤 2028년까지 연구중심 의대와 900병상 규모의 병원을 세운다. 포스텍 관계자는 “포항은 상급종합병원이 없어 포항시와 경상북도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협 “의대 정원 증원 절대 불가”
의료계는 폭풍 전야다.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의사 단체들은 정부가 의사과학자 양성안을 발표하면 단체 행동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의료계에서는 의사과학자 양성 계획이 의대 정원 증원으로 이어질 것으로 우려한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인구수는 줄고 의사 수는 늘어나는 상황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의사과학자도 결국 의사이기 때문에, 의사과학자 프로그램을 마치고 임상의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 의료계는 의사과학자를 기존 의대에서 육성하도록 지원하면 된다고 본다. 또 KAIST와 포스텍 등에서 별도의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 경우 졸업생들은 임상의가 될 수 없도록 법제화를 요구할 계획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확고하지만, 의사들의 입장도 무조건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앞서 지역 공공의대 신설을 추진하다가 의사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이를 전면 보류했던 일로 비판을 받았었다.
[바이오는 반도체보다 더 큰 산업… 거스를 수 없는 글로벌 트렌드]
강대희 서울대 의대 교수
의사과학자양성협의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강대희 서울대 의대 교수는 23일 “세계적으로 연간 2조달러(약 2670조원)에 육박하는 바이오 산업은 반도체보다 더 큰 산업”이라며 “이 산업을 의사과학자가 주도하는 것은 글로벌 트렌드이고, 우리도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의사과학자 양성의 가장 큰 걸림돌로는 처우를 꼽았다. 의사과학자가 되고 싶더라도, 수입과 처우 때문에 결국 임상의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미국의 국립보건연구원(NIH) 같은 국립의과학연구원을 설립해 의사과학자들이 마음껏 연구할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면서 “현재 이 역할을 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에 설립에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의료계의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강 교수는 “KAIST와 포스텍에서 의대를 세운다고 해도 100여 명의 의사만 늘어날 뿐”이라며 “의사 100명이 늘어난다고 의료계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