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개편안을 놓고 불거진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내부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국산 발사체 누리호 발사 성공을 이끈 고정환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과 사업본부 내 부장 5명이 보직 사퇴서를 제출한 데 이어 옥호남 나로우주센터장도 지난 16일 사퇴서를 냈다. 하지만 항우연은 20일 개편안에 따른 인사 발령을 내며 조직 개편을 강행했다.
20일 항우연은 발사체연구소를 신설하고 그 산하에 실 2개(제품보증실·연구조정실)와 부 6개를 두는 후속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기존의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가 새로 생긴 발사체연구소 산하로 편입돼 9개 부·단·본부 가운데 하나가 됐고, 고정환 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은 누리호 고도화사업단장을 겸직하게 됐다. 누리호 발사체 조직을 이끌었던 수장이 새로운 연구소장 아래 단장으로 인사가 난 것에 대해 “모욕 주기 인사 발령”이라는 반발이 나오지만, 항우연은 “미래 준비를 위한 조직 개편”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사태 발단은 11년 전 정부가 꾸린 발사체 사업단
이번 사태의 발단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당시 교육과학기술부는 항우연이 관리해온 발사체 사업을 교과부 산하의 사업단 체제로 바꾸고 단장을 공모했다. 나로호의 두 차례 발사 실패 후 정부가 직접 관리하겠다는 게 이유였다. 2013년 한국형발사체사업단은 항우연으로 다시 들어와 본부로 격상했지만, 본부장은 과기정통부장관이 임명하고 있다.
이처럼 발사체 조직이 외부에 독립했다가 항우연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사실상 별도의 조직처럼 움직이게 됐다. 장관이 임명하는 본부장은 긴 사업 기간 혼자 조직을 이끈다. 고정환 본부장도 2015년부터 지금까지 발사체 본부장을 7년째 맡아왔다. 항우연 원장이 세 차례 바뀌는 동안 발사체본부장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항우연에 따르면, 발사체 평균 보직 기간은 8.8년으로 다른 조직보다 긴 편이다.
탁민제 카이스트 명예교수는 “정부가 나로호 실패를 이유로 발사체 사업단을 만들고 이후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항우연 조직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별개 조직처럼 따로 움직이는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며 “이번 갈등의 불씨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항우연 내부의 특수한 조직도 갈등 확대에 한몫했다는 지적이다. 항우연은 발사체와 위성, 항공 등 세 분야 조직으로 이뤄져 있다. 그렇다 보니 연구원에 자신의 전공으로 입사하면 평생 같은 동료들과 연구를 하게 된다.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소통과 설득 부족했다는 지적 나와
조직 개편에 앞서 항우연의 내부 설득 과정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대학교수는 “발사체 조직은 난도가 높은 기술에 성공하기 위해 수많은 실패를 감수하고, 대규모 예산 사업을 맡기에 주변의 견제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며 “최소 20년간 함께하며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사람들이어서 이번 조직 개편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고 본부장의 사의에 이어 5부장 전원과 나로우주센터장이 일괄적으로 사퇴서를 낸 배경이라는 것이다.
이번 갈등에 대한 항우연 안팎의 시선은 곱지 않다. 항우연의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다고 한다. 이번 갈등이 이상률 현 원장과 조광래 전 원장의 세력 다툼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창진 건국대 교수는 “항우연 구성원들이 조직 개편을 놓고 마치 선과 악의 대결인 것처럼 서로 몰아가고 있다”며 “갈등이 고조돼 감정 싸움으로 치달으면 항우연 조직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와해돼 국가 우주개발 사업에도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주무 부처가 제 역할을 못 하면서 사태가 커졌다는 지적도 있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 19일 기자 간담회에서 “조직 개편 과정에서 서로 의견 차이가 있어 발생한 일”이라며 “항우연 당사자들이 충분히 논의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일 오태석 과기정통부 1차관도 같은 입장을 밝혔다. 이번 갈등은 과기정통부가 개입하지 않고 항우연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항우연 안팎에서는 “주무 부처가 남 이야기하듯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