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의 싱크탱크인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의 33년 차 연구원이 “STEPI가 온몸이 병들고 무너져 가는 중환자 같다”고 비판했다. 문재인 정부 때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으로 있으면서 탈원전 정책을 주도한 문미옥 원장이 취임한 이후 STEPI가 과학 정책 싱크탱크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정면 비판한 것이다.
이민형 STEPI 선임 연구위원은 지난 17일 내부 게시판에 ‘STEPI, 이대로는 더 이상 존립하기 어렵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 선임 연구위원은 1990년부터 STEPI에서 일해온 과학기술 정책 전문가다. 그는 “최근 우리 기관을 아는 외부 인사들의 평가는 참혹하다”며 “연구 기관 운영은 행정이 중심이고, 정책 연구는 예산 사용을 위한 형식적 업무 정도로, 연구자는 오직 돈을 벌어오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원장을 포함한 연구직 보직자 총사퇴를 요구했다. 이 글은 850회가 넘는 조회를 기록하고 있다. STEPI 직원은 160여 명이다.
◇”연구자 돈 벌어오는 도구로 전락”
1987년 설립된 STEPI는 국가 주요 과학기술 의제를 제시하고 정책을 설계하는 싱크탱크다. 문재인 정부 시절 대통령 과학기술보좌관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차관을 지낸 문미옥 원장이 2021년 1월 취임했다.
그가 STEPI를 이끈 2년 동안 연구원 안팎에서는 “전문성 없는 원장이 오면서 연구원이 망가지고 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다. 그가 임명될 당시에도 비전문가 ‘낙하산’ ‘회전문’ 인사라는 논란과 함께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이 “문미옥 전 차관은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 자격이 없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STEPI의 여러 연구원에 따르면 문 원장 취임 이후 STEPI는 중장기 과학기술 전략 수립을 위한 연구보다는 데이터 정리 같은 단순 사업 비중이 높아졌다고 한다. 부처 사무관도 할 수 있는 낮은 수준의 연구 과제를 STEPI가 수행해 왔다는 것이다. STEPI의 한 연구원은 “미래 기술 발굴이나 국가 과학기술 어젠다를 세우기보다 기존 정책을 뒷받침하는 수준의 연구 사업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한 이공계 대학 교수는 “교수들이 학부생 강의에서조차 활용하지 않을 정도로 요즘 STEPI 보고서 수준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STEPI가 과학기술 연구라는 본연의 업무보다는 조사·평가 업무까지 가져와 연구 역량이 분산된다는 지적도 있다. STEPI는 대규모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의 정책·경제적 타당성을 평가하는 예비 타당성 조사도 맡고 있다. 예타 조사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맡아 왔는데 이 업무의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한 전문가는 “싱크탱크의 역할이 아닌 평가 업무를 맡는 건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형 선임 연구위원은 “보직·평가·승진·포상은 기관장의 내 편 챙기기 수단이 됐다”며 “연구원 사회의 생명과도 같은 전문성은 내팽개쳐지고 의도적인 갈라치기로 시니어 연구원은 불필요한 존재가 됐다”고 했다. 다른 연구원은 “연구의 중요성보다 외부에서 돈 되는 연구 과제를 따오는 데 연구원들이 내몰렸다”고 했다.
◇”연구원을 정치적 입지 넓히는 데 활용”
연구원 내부에서는 문 원장이 자기 자리를 정치적 입지를 넓히는 데 이용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STEPI는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백혜련(국회 정무위원장) 의원과 함께 정책 포럼을 개최했다. 민주당 박홍근·김종민 의원도 이 행사에 참석했다. 문 원장은 민주당 소속으로 20대 국회의원(비례대표)을 지냈다. 지난해 5월 개원 35주년 포럼에도 민주당 이원욱·김한정 의원이 참석해 축사했다. 한 과학계 인사는 “STEPI는 그동안 연구 독립성 유지를 위해 특정 정당과 함께 행사를 하지 않았다”며 “이런 식이면 기관이 정치권의 입김을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느냐”고 했다.
문 원장은 이전 정부에서 청와대 과기보좌관과 과기정통부 차관을 지내며 과학기술 정책을 주도했지만 정작 연구 현장에서는 “현실을 도외시한 정책을 밀어붙인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학생 연구원 근로계약 체결 추진이다. 문 원장이 과기보좌관 당시 발표한 정책으로, 열악한 학생 연구원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실질적 처우 개선보다는 연구 기관의 인건비 예산 부담만 늘어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또 과학계 의견은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탈원전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반발을 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