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 오브 페임(Hall of Fame)>
지구와 우리 삶을 바꾼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발자취를 다룹니다.
이들의 한 걸음이 인류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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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70년 전인 1953년 4월25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DNA(디옥시리보핵산)과 관련된 논문 세 편이 발표됩니다. 이 가운데 첫번째 논문의 저자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20세기 가장 유명한 과학자로 불리는 이들의 논문은 생명에 대한 인류의 인식을 영원히 바꿔 놓습니다. 2페이지, 사용된 단어가 고작 900개 수준에 불과한 짧은 논문은 DNA가 이중나선 구조라는 사실과 그림을 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네이처에 게재된 두번째 논문의 공동 저자이기도 했던 킹스칼리지 연구자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성공 스토리 이면에는 신화처럼 전해지는 희생자가 한명 등장합니다. 세 사람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킹스칼리지의 화학자이자 윌킨스의 동료였던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찍은 X선 회절 사진을 몰래 훔쳐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윌킨스가 몰래 사진을 왓슨과 크릭에게 넘겼고, 이 사진과 연구자료를 본 두 사람이 DNA가 이중나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식이죠.
프랭클린은 1958년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DNA 구조 발견의 영광은 왓슨과 크릭, 윌킨스가 차지했고 프랭클린은 노벨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실제로는 생존자에게만 시상하는 노벨상의 원칙 때문에 프랭클린은 1962년 노벨위원회의 심사 대상조차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들이 쌓이면서 프랭클린은 이른바 과학계의 ‘다크 레이디(Dark lady)’로 불립니다. 과학의 역사에서 소외되고 철저하게 지워진 여성 과학자의 상징이 된 겁니다. 여성 과학자 차별 얘기가 나올 때마다 프랭클린이 대표 사례로 언급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DNA 구조 발견 과정에서 희생된 피해자로 보는 것은 올바른 시각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가 DNA 구조 발견에 기여한 위대한 연구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죠. 왓슨과 크릭의 역사적인 논문을 실었던 네이처 최신호(4월26일자)에 게재된 기고문입니다.
영국 맨체스터대 매슈 코브 교수와 미국 존스홉킨스대 너새니얼 컴포트 교수는 이 글에서 “이전에 간과했던 한 통의 편지, 새로 발견된 1953년 미발행 기사 등을 통해 프랭클린이 DNA 구조 발견에 노벨상 수상자들과 동등한 기여자였다는 증거를 확인했고, 희생자도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1950년대 전세계 과학자들이 뛰어들었던 DNA 구조 연구 전쟁 당시 영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왓슨의 ‘이중나선’이 만든 현실 왜곡
프랭클린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왓슨의 1968년 베스트셀러 ‘이중나선’ 덕분입니다. DNA 구조 규명 과정을 밝힌 이 책에서 왓슨은 프랭클린을 ‘로지’라고 부르며 “나와 크릭이 프랭클린 모르게 그의 데이터를 사용했다”면서 “로지가 데이터를 직접 제공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깐깐하고 욕심많은 여성”이라는 표현도 있었습니다. 마치 데이터를 훔쳐서 연구성과를 거뒀다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얘기입니다.
뉴욕타임스는 “이 설명은 왓슨과 크릭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고, 프랭클린을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면서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오랜 논쟁거리”라고 했습니다. 코브와 컴포트 교수 두 사람은 “실제로는 널리 알려진 것보다 (왓슨과 크릭의 행동이) 악의적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코브는 크릭의 전기를 집필 중이고, 컴포트는 왓슨의 전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국 케임브리지 처칠 칼리지의 프랭클린 기록보관소에서 두 건의 새로운 문건을 발견했고, 당시 일어났던 사건을 재구성했습니다. 이 문건들은 1953년 프랭클린의 동료였던 폴린 카원이 크릭에게 보낸 편지, 같은 해 타임지 기자 조앤 브루스가 작성하고 보도하지 않은 기사였습니다.
1950년대 초반 프랭클린과 윌킨스는 킹스칼리지에서, 크릭과 왓슨은 케임브리지에서 DNA 구조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화학자이자 훗날 노벨상을 받은 라이너스 폴링도 이 분야의 선두주자였습니다.
킹스칼리지팀과 케임브리지팀은 접근 방식이 달랐습니다. 프랭클린과 윌킨스는 X선을 사용해 DNA의 이미지를 촬영하는 방식으로 구조를 규명하려고 했고, 크릭과 왓슨은 분자 모델을 구축해 DNA의 실체를 밝히려고 했습니다. 한쪽은 실험, 한쪽은 이론이 중심이었다는거죠.
1952년 5월 프랭클린은 이른바 ‘51번 사진(Photograph 51)’으로 불리는 X선 회절 사진을 촬영합니다. 분자생물학계에서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이라고 불리는 이 사진은 DNA가 이중나선이라는 결정적 힌트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왓슨은 이후 킹스칼리지 방문 당시 이 사진을 봤습니다. 또 1952년 크릭의 상사인 분자생물학자 막스 페루츠는 킹스칼리지에서 프랭클린의 미발표 연구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받았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이 미발표 데이터가 실제로 51번 사진보다 더 유용한 연구자료였다”고 했습니다. 이 과정이 왓슨의 이중나선 책에서 사진을 몰래 훔쳐보고 이중나선 구조를 곧바로 떠올린 것처럼 극적으로 묘사됐죠. 마치 프랭클린은 사진을 찍어 놓고도 중요성을 몰랐고, 자신은 자신을 보자마자 실체를 알아챘다는 겁니다.
◇DNA 구조 규명에 결정적 공헌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타임의 미발행 기사는 DNA 구조 규명이 실험 중심의 윌킨스·프랭클린팀과 이론 중심의 크릭·왓슨 연구팀이 함께 이뤄낸 성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연구팀은 독립적으로 연구했지만 서로의 연구결과를 공유했고, 공통의 문제를 토론하거나 검증하기도 했다는 겁니다.
킹스칼리지 연구자가 크릭에게 보낸 편지에는 “프랭클린이 결정학 강연에 크릭을 초대했는데, 이 강연은 결정학에 관심이 없는 청중을 위한 것으로 크릭이 이미 강연 내용보다 훨씬 많은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참석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자들은 이 편지가 프랭클린의 연구 성과를 이미 왓슨·크릭팀은 물론 케임브리지 연구자들까지 널리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암시하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코브와 컴포트는 “이런 자료를 종합적으로 보면, 프랭클린은 연구 결과를 도난 당한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공유한 것에 가깝다”면서 “프랭클린은 희생자가 아니라 ‘DNA 구조를 규명한 4중주단’의 당당한 일원이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저자들은 왓슨의 이중나선에 등장했던 얘기들이 여러 곳에서 과장됐다고 지적합니다. 숙련된 화학자였던 프랭클린도 자신이 찍은 사진과 연구성과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결정학에는 초보자였던 왓슨이 이중나선을 바로 파악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실제 51번 사진은 DNA가 나선이라는 점만 시사하고 있을 뿐 이중나선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또 왓슨의 이중나선에 따르면 사진을 본 다음 시점인 1953년 1~3월 사이에도 왓슨과 크릭은 이중나선에 대한 논의를 거의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프랭클린은 DNA 구조 규정에 결정적인 몇 가지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프랭클린은 어떤 방식으로 X선 회절 사진을 찍어야 구조를 파악하는데 더 유용한지 알아냈습니다. DNA 단위의 크기가 당시까지의 상식보다 훨씬 크다는 것, DNA가 어떻게 단백질을 지정할 수 있는지도 혼자서 알아냈습니다. 다만 프랭클린은 DNA를 이루는 A가 T와만 결합하고, C는 G와 결합한다는 식의 상보적 염기쌍에 대해서는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에는 프랭클린의 성격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프랭클린은 연구의 상당 부분을 혼자서 생각하고 진행했습니다. 윌킨스와는 여러모로 맞지 않았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잘못 알려진 불화
왓슨과 크릭이 프랭클린의 연구를 숨기고 기여를 은폐했다는 것부터가 사실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1953년 네이처 논문에 “윌킨스와 프랭클린의 미발표 실험 결과와 아이디어에 자극을 받았다”고 썼습니다. 다만 “세부적인 내용은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듬해 출판된 논문에서는 “프랭클린의 데이터가 없었다면 DNA 구조 규명은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지만,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성과가 명백히 프랭클린의 도움을 받았다고 인정한 것이죠.
코브와 컴포트는 이후 벌어진 일에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습니다. 왓슨의 이중나선 출판을 기점으로 퍼지기 시작된 잘못된 오해와 편견을 왓슨이나 크릭 모두 적극적으로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비공식적인 연구결과 공유가 당시에 만연했다고 하더라도, 프랭클린에게 데이터 사용 허가를 정식으로 요청하지 않았던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했습니다.
이중나선 발간 이후 프랭클린의 이미지는 왜곡됐습니다. 2015년 런던에서 막을 올렸던 니콜 키드먼 주연의 연극 ‘51번 사진’에도 프랭클린은 희생자로 묘사됐습니다. 2020년 프랭클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발행된 영국 50펜스 동전에는 ‘51번 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 소셜미디어에서는 “1953년 왓슨과 크릭이 발견한 것은 (DNA가 이중나선이라는 것이 아니라) 프랭크린의 데이터”라는 조롱도 넘쳐 났습니다.
하지만 프랭클린이 왓슨과 크릭의 행동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거나 희생됐다고 생각한 증거는 없습니다. 뉴욕타임스는 “DNA 구조 규명 이후에도 프랭클린은 왓슨, 크릭이라는 케임브리지 듀오와 친하게 지냈다”면서 “다만 이중나선이 발간될 때까지 프랭클린이 살아 있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프랭클린이 미국 초청 강연을 나가려고 할 때 왓슨이 직접 동행을 요청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프랭클린이 사망할 때까지는 DNA 구조 규명이 어떤 연구로 이어질지 과학자들이 모색하는 단계였고 DNA가 생명연구의 핵심으로 떠오른 것은 훨씬 뒤였습니다. 왓슨·크릭·윌킨스가 노벨상을 받은 것이 1962년이라는 점을 다시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 진단 후 사망 직전까지 연구
1945년 케임브리지에서 물리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프랭클린은 대단하고 위대한 과학자였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탄소재료 구조를 해석했고, 바이러스와 RNA 구조 분석에도 도전했습니다. 박철완 서정대 자동차학과 교수의 글에 따르면 프랭크린의 성과는 현대 탄소재료의 구조 규명으로 이어지면서 리튬이온 이차전지의 발명과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를 밝히면서 최초로 바이러스 구조를 확인한 과학자로 기록되기도 합니다.
프랭클린은 1956년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난소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958년 사망하기까지도 그의 연구는 계속됐습니다. 1956년 7편, 1958년 7편의 논문을 작성했을 정도입니다. 일각에서는 그가 X선 실험을 진행하면서 방사선에 노출됐고 이 때문에 암에 걸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방사성 물질 연구를 하다가 암으로 숨진 마리 퀴리가 연상되는 부분이죠.
먼저 언급했다시피 세상을 일찍 떠난 프랭클린은 노벨상 후보로 지목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동료이자 그의 유언에 따라 3000파운드와 자동차를 물려 받은 아론 클루그가 1982년 노벨 화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했습니다. 전자현미경으로 분자 구조의 해석 방법을 개발한 클루그의 연구는 프랭클린이 처음 시작했고, 프랭클린이 클루그에게 소개했습니다. 굳이 DNA 구조 규명이 아니더라도, 프랭클린이 노벨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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