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 오브 페임(Hall of Fame)>
지구와 우리 삶을 바꾼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발자취를 다룹니다.
이들의 한 걸음이 인류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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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오랜 공포의 대상 암이 생기는 원인은 수만 가지가 넘습니다. 생기는 신체 부위나 형태에 따라 제각각입니다. 진단 기술의 발달로 인한 조기 발견과 치료법·항암제 등의 등장으로 점차 많은 사람이 암을 극복하고 있지만, 암이 인류의 가장 큰 적이자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백신을 맞으면 90%는 걸리지 않는 암이 있습니다. 바로 자궁경부암입니다. 이 암을 일으키는 인유두종 바이러스(HPV·human papillomavirus)를 발견해 백신 개발을 가능하게 한 독일 암연구센터 대표연구원 하랄트 추어 하우젠(Harald zur Hausen) 박사가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독일 하이델베르크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추어 하우젠은 여성 암 가운데 둘째로 발병률이 높은 자궁경부암 예방과 정복의 길을 열면서 수많은 생명을 구했고, 그 공로로 20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추어 하우젠과 함께 노벨상을 받은 프랑스의 프랑수아즈 바레시누스 박사와 뤼크 몽타니아 박사는 에이즈를 일으키는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IV)의 발견자였습니다. 당시 노벨위원회는 “세 사람은 인류에게 큰 피해를 준 질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찾아냈다”면서 “이들은 바이러스가 암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교리(敎理)와 같은 통념에 도전했다”고 했습니다.
◇사마귀가 준 아이디어
1970년대 과학자들은 자궁경부암이 단순 포진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추어 하우젠은 자궁경부암 환자의 생검(生檢)에서 단순 포진 바이러스로 인한 헤르페스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가 1974년 학회에서 이런 결과를 발표하자 모두가 그를 비난했습니다.
자궁경부암의 원인을 찾아 연구를 계속하던 추어 하우젠은 생식기 주변에 나는 사마귀가 드물게 암으로 발전한다는 보고서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사마귀가 피부 또는 점막이 인유두종 바이러스에 감염돼 발생하는 질환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마귀는 양성으로 분류됐고, 다른 치명적인 질환과는 연관이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추어 하우젠은 인유두종 바이러스의 게놈(유전체)을 이용해 자궁경부암 환자의 세포에서 인유두종 바이러스 DNA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비판에도 “나는 내가 옳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유두종 바이러스가 워낙 많은데다 유형마다 고유한 유전적 염기서열이 있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암을 유발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작업은 지루하게 이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인유두종 바이러스를 조직 배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다른 사람이 황당하게 생각하는 그의 연구는 연구비 충당조차 어려웠습니다.
추어 하우젠은 실망하는 학생과 동료에게 “나는 이것이 옳다는 것을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결국 1983년까지 추어 하우젠 박사와 동료는 두 종류의 인유두종 바이러스를 자궁경부암 세포에서 찾아냈습니다. 대규모 자궁경부암 환자 생검 결과 70%가 이 두 바이러스 가운데 하나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른바 HPV 16, HPV 18로 불리는 인유두종 바이러스가 자궁경부암을 유발하는 핵심 원인이라는 것이 밝혀진 겁니다.
추어 하우젠 박사는 자신의 연구 성과와 시료를 다른 연구자들에게 기꺼이 나눠줬습니다. 인유두종 바이러스를 연구하던 전 세계 학자들이 모두 달려들었고, 결국 바이러스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높아지면서 자궁경부암 백신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최초의 백신은 2006년에 승인됐습니다. 현재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접종되는 가다실, 서바릭스 같은 백신이 탄생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자궁경부암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인유두종 바이러스는 현재까지 전 세계 모든 암 발병의 5%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명으로 얼룩질 뻔한 노벨상
추어 하우젠은 1936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겔젠키르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학교가 문을 닫고, 초등 교육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1960년 뒤셀도르프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필라델피아 어린이병원 연구실에서 헤르페스 바이러스 과의 한 종류인 앱스타인-바 바이러스를 주로 연구했습니다. 당시 앱스타인-바 바이러스는 중국 남부에서 주로 발견되던 비인두암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됐는데, 추어 하우젠은 실제로 둘 사이의 연관을 밝혀냈습니다. 바이러스가 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계기였습니다.
로버트 코흐상, 암 연구 평생 공로상, 독일 공로 훈장 기사 십자상, 에른스트 베르트하임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역시 노벨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추어 하우젠의 노벨상 수상에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2008년 노벨위원회에는 자궁경부암 백신의 특허 로열티를 받는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의 이사회 멤버 보 엔절린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당시 아스트라제네카는 노벨 미디어와 파트너십을 맺고 다큐멘터리, 강의를 후원하고 있었습니다. 노벨상의 권위를 흔드는 스캔들이 될 뻔했지만 전 세계 의학계는 추어 하우젠이 노벨상을 받을 충분한 업적을 쌓았다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노벨위원회와 스웨덴 검찰은 엔절린이 투표 당시 아스트라제네카의 백신 특허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오명을 벗은 겁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그의 동료들은 그를 클래식을 사랑하고 예의바르며 흠잡을 곳 없는 옷차림을 한 남자로 기억한다”면서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도 오만함 따위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은 불장난
추어 하우젠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은 편견 및 오해와 여전히 싸우고 있습니다. 2006년 미국식품의약국(FDA)은 청소년의 자궁경부암 백신을 승인했습니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17세 미만 미국 소년·소녀의 75% 이상이 백신을 접종합니다. 그 결과 미국의 자궁경부암 발생률은 매년 1만3000건으로 줄었고, 사망도 4000명 정도로 줄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면 최소 1회 접종을 받은 여성 청소년의 비율은 2019년 20%에서 2021년 15%로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백신이 몸에 해로울 것이라는 오해와 부작용에 대한 과도한 우려, 종교적인 이유 등이 백신 접종을 꺼리게 하는 겁니다. 2020년 한해에만 34만2000명이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추어 하우젠은 백신을 옹호하는데 평생을 바쳤다”면서 “하지만 고국인 독일에서조차 코로나 팬데믹 기간 더욱 강력해진 백신 반대 단체의 저항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추어 하우젠은 이에 대해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은 불장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