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 오브 페임(Hall of Fame)>

지구와 우리 삶을 바꾼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발자취를 다룹니다.

이들의 한 걸음이 인류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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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최고 흥행 드라마였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 우영우가 등장합니다.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지만, 주변의 편견과 오해와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존재로 그려지죠. 물론 우영우를 사랑하며 따뜻하게 포용하고, 그가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도록 돕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포스터

주변에서 자폐 장애인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같은 행동이나 말을 반복하거나 순간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특성 때문에 자폐 장애인은 물론 가족도 외출을 꺼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정신 질환이 아닌 장애의 일종이지만 색안경을 쓰고 쳐다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자폐 진단은 수십 년 동안 급속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2006년에는 110명의 어린이 가운데 1명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진단받았지만, 올해 3월에는 36명 가운데 1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왜 이렇게 진단율이 늘어나는 것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언제 자폐 연구가 시작됐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1943년 ‘사례 1(Case 1)’으로 불리는 첫 자폐 장애인에 대한 진단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에 놀랐을 수도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자폐 장애 진단을 받은 ‘Case 1′ 미국의 도널드 트리플렛(Donald Triplett)이 지난 15일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계 최초의 자폐 장애인 도널드 트리플렛 /트리플렛 아카이브

트리플렛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사례는 자폐에 대한 의학계의 이해가 높아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고, 이전까지 격리되고 방치되는 것이 당연해졌던 자폐 장애인의 삶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자폐협회 대표인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성명에서 “트리플렛은 자신의 열정과 관심사를 추구할 기회를 얻었고 자신의 기준에서 매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면서 “그는 지역 사회에서 알려졌고, 받아들여졌으며 지역 사회에서 칭송받았다. 이 모든 것은 포용적인 사회가 왜 필요한지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세상과 동떨어진 어린이

도널드 트리플렛의 어린 시절 /트리플렛 아카이브

트리플렛은 1933년 9월 미시시피의 소도시 포레스트에서 변호사 아버지와 은행가 집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특이했습니다. 가족이나 사회와 동떨어진 세상에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관심이 없었고,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남자는 물론 어머니의 미소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각각의 설명할 수 없는 숫자로 불렀고 “나는 작은 쉼표나 세미콜론을 넣을 수 있습니다” 또는 “검은 구름을 통해 빛난다” 같은 말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특히 요리용 프라이팬같이 둥근 물체를 회전시키는 것 같은 특정한 행동에 열광했고, 자신이 관심을 갖는 무언가가 중단되면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그는 87에 23을 곱한 결과를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었고, 노래를 한 번만 들어도 완벽한 음높이로 따라 불렀다”면서 “고등학교 건물 정면의 벽돌을 잠시 본 뒤 벽돌 개수를 모두 맞췄다는 소문까지 마을에 돌았다”고 했습니다. 두 살에 이미 ‘여호와는 나의 목자’로 시작하는 시편 23편을 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자폐 장애인에 대해 생각하는 전형적인 모습인 셈입니다.

◇케이스 1 진단

최초로 자폐 장애를 진단한 레오 캐너 존스홉킨스대 교수 /위키미디어

당시만 해도 이런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은 시설에 영구 격리하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1937년 그의 부모는 사나토리엄이라는 마을에 있는 국영 어린이 시설로 그를 보냈고, 한 달에 두 번씩만 방문했습니다. 트리플렛을 관찰한 보고서에는 그가 무기력하게 갇혀 있었고, 온종일 움직이지 않는 날도 있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1년 뒤 그의 부모는 그를 집으로 다시 데려왔고 볼티모어에 있는 레오 캐너(Leo Kanner)라는 의사에게 데려갔습니다. 캐너는 존스홉킨스대에 미국 최초의 아동 정신과 클리닉을 설립한 권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트리플렛의 상태를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몇 년간의 연구 끝에 캐너는 1943년 의학학술지 ‘병리학’에 ‘정서 접촉의 자폐 장애(Autistic Disturbances of Affective Contact)’라는 논문을 발표합니다. 이 논문에 트리플렛은 ‘Case 1′으로 등장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자폐라는 진단과 자폐 장애인이라는 분류가 만들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이 논문에는 모두 11명의 자폐 아동이 등장하는데 트리플렛을 제외한 나머지 아동들은 주립 학교 또는 병원에 갇혀 있었고 훨씬 더 열악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캐너는 이 논문에서 강박적이고 반복적인 습관, 뛰어난 기계적 기억력, 다른 사람과 평범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장애 등을 자폐의 특징으로 꼽으면서 “지금까지 보고된 어떤 증상과도 현저하고 독특하게 다른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형태의 증상은 희귀하지만, 아마도 관찰된 사례보다는 더 자주 발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모두 정신분열이나 정신박약으로 분류되던 증상이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이 논문은 트리플렛의 아버지가 아들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건넸던 방대한 메모와 함께 오늘날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알려진 증상의 기초가 됐다”면서 “CDC와 미국 정신과협회의 공식 설명은 여전히 80년 된 캐너의 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세계 최초로 자폐 장애를 진단한 레오 캐너의 논문 /워드프레스


◇환경 덕분에 행복한 삶 보내

세계 최초의 자폐 장애인 도널드 트리플렛(가운데)와 그의 삶을 보도한 기자들. /존 돈반

트리플렛의 가장 큰 행운은 그를 둘러싼 환경이었습니다. 부모와 마을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트리플렛은 미시시피 잭슨에 있는 밀삽스 대학을 졸업하고, 외할아버지가 공동 창립한 은행에 회계사로 취직했으며 시청의 모닝 커피 클럽에서 사람들과 어울렸습니다. 운전을 배웠고 자신의 캐딜락을 몰았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리플렛은 골프를 치고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최소한 세계 30국을 방문했다”면서 “하와이는 17번이나 여행했다”고 했습니다.

트리플렛의 이런 인생은 1943년 논문 발표 이후 2010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010년 디 애틀란틱에 기자 존 돈반과 카렌 저커의 기사 ‘첫 자폐 아동(Autism’s Fisrt Child)’이 게재된 뒤에야 미국 전체의 화제가 됐습니다. 이 기사는 2016년 책으로 만들어져 2017년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까지 올랐고, 지난해에는 PBS에서 동명의 다큐멘터리로 방영됐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돈반과 저커는 트리플렛의 행복한 삶에 가족의 부와 사회적 지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지만, 무엇보다 트리플렛의 고향과 3000명의 마을 사람들에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마을에 등장한 이상한 소년(후에는 남성)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분명한 결정을 내렸다는 겁니다.

실제로 돈반과 저커가 트리플렛을 취재하는 동안 포레스트 주민들은 세 차례에 걸쳐 이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당신들이 하는 일이 돈(프리플렛)에게 상처를 준다면 어디에서 당신을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트리플렛을 완전한 구성원으로 여겼다는 얘기입니다.